SK해운 등을 통해 조성한 100억원 이상의 비자금을 2000년 총선과 작년 대선 때 여야 정치인들에게 건넨 혐의다.
한국 대기업들을 대표하는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이기도 한 손 회장의 행동은 건강한 정치-경제 관계를 원하는 국민들을 다시 한번 실망시켰다.
더구나 손 회장은 대통령 후보 경선이 본격화되던 작년 초 “정치권의 부당한 정치자금 요구를 거부하겠다”고 선언해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그가 회장으로 있는 전경련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불법 정치자금 거부’를 결의했다.
손 회장이 말과 다른 행동을 한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고, 실정법을 어겼다면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손 회장을 비롯한 기업인들을 단순히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이고 말기에는 왠지 석연찮은 마음이 든다. 손 회장은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 “정치자금 제공은 기업의 오랜 관행”이라면서 ‘기업의 어려운 사정’을 설명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경제계에서는 다음과 같은 우스갯소리가 떠돈다. “한국의 정치인과 기업인은 교도소 담 위를 걷고 있다”는 자조적인 말이다. 항상 교도소 담 위를 걷고 있으므로 재수가 나쁘면 교도소 안으로 떨어지고, 재수가 좋으면 교도소 밖으로 떨어진다는 얘기다.
실제로 한국의 주요 기업인 가운데 정치자금과 관련해 조사나 처벌을 받지 않은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1995년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으로 삼성, 대우그룹 총수를 포함한 35명의 기업인들이 기소되었으며, 최근엔 현대 정몽헌(鄭夢憲) 회장이 조사를 받다가 스스로 유명을 달리했다.
미국 독일 프랑스 등 선진국에서도 정치자금 스캔들은 있다. 그런데도 특히 한국에서 불법 정치자금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일부 부도덕한 사람뿐 아니라 대부분의 정치인과 기업인이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데 있다.
정치자금 문제가 얼마나 골치 아팠으면 경제계는 “특별법을 만들어 그동안의 불법 정치자금을 고백성사하고 일괄 사면하자”는 안까지 내놓았을까. 올 들어서는 “법인세의 1%를 정치자금으로 하자”는 아이디어도 나왔다.
모 그룹의 한 고위 임원은 사석에서 “기업은 이미 불법 비자금을 마련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리고 있다. 이젠 정치권이 달라져야 한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의 말대로 기업 환경은 최근 몇 년 사이 크게 달라졌다. 기업들은 매일 세계 자본시장에서 평가받으며 그만큼 투명한 경영을 요구받고 있다. 분식회계에 대한 집단소송이나 불법 정치자금에 대한 주주대표소송 역시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돼가고 있다. 회계조작이나 리베이트 별도관리 등을 통해 수백억원대의 비자금을 마련하는 일 자체가 어려워진 것이다.
공급자측이 변하고 있는 만큼 이젠 수요자인 정치권에서 돈 안드는 정치, 투명한 정치를 실천하기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한다. 그래야 손 회장처럼 한 손에는 불법 정치자금 거부 결의문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비자금을 마련하는 기업인이 줄어들 것이다.
신연수기자 ys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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