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장하준/‘早老 경제’ 처방은 있다

  • 입력 2003년 10월 14일 18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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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예금이자율이 사상 최저 수준인 4% 이하로 떨어지면서 바야흐로 물가상승률과 이자소득세를 감안하면 실질이자 소득이 마이너스가 되는 초저금리 시대가 열렸다고 한다.

그러나 명목금리가 사상 최저라는 것이 실질금리도 사상 최저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60년대나 70년대에는 명목금리는 높았지만 인플레가 높아 실질 예금금리는 마이너스인 때가 많았다. 인플레가 비교적 높았던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 사이에도 실질금리가 지금과 유사한 수준인 1∼2% 선까지 떨어진 적이 있었다.

▼기업들 돈 움켜쥐고 투자 안해▼

그러니 ‘사상 초유의 초저금리’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얘기라고 하더라도 현재의 저금리 현상이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인 것은 사실이다. 투자의 급락으로 자금 수요가 급감하면서 생긴 현상이기 때문이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이러한 현상이 기업들이 사상 최고의 이윤을 내고 사상 최대 규모의 현금을 보유한 상황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2002년 제조업체의 경상이익률(영업을 통한 이익에서 이자비용을 뺀 이윤율)은 4.7%에 이르러 1988∼1997년 평균인 2.1%의 두 배가 넘었고, 현금예금은 46조6000억원으로 1991∼1997년 평균인 20조5000억원의 2.3배나 되었다. 일견 유사 이래 최대의 ‘건전 경영’이다.

그러나 제조업 설비투자는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과거의 3분의 2 수준으로 떨어졌다. 즉, 1991∼1997년 설비투자는 연평균 31조5000억원이었으나 1998∼2002년에는 연평균 20조6000억원에 불과했다. 2002년의 설비투자는 20조7000억원으로 1991년의 22조9000억원보다도 낮다. 이 기간 국민총생산(명목금액 기준)이 2.7배나 늘었음을 감안하면 2002년의 설비투자는 사실상 1991년의 3분의 1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일부에서는 투자가 줄어든 것이 우리 경제가 성숙하면서 투자 기회가 줄었기 때문에 생긴 불가피한 현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 경제의 국민소득 대비 투자율은 1990∼1997년 평균 37.1%에서 1998∼2002년에는 평균 25.9%로 떨어졌다. 경제가 아무리 성숙해진다고 해도 투자 기회가 하루아침에 3분의 2로 줄어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본이 현재 우리나라 정도의 발전 수준이던 60년대 말 내지 70년대 초의 투자율이 국민소득의 30∼35%였다는 사실에 비춰 보면 우리의 투자 급감은 경제의 성숙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기보다는 무엇인가 잘못돼 일어난 조로(早老) 현상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면 왜 이러한 조로 현상이 일어났는가. 한마디로 외환위기 이후 추진된 신자유주의적 구조개혁 때문이다. 자본시장이 완전 개방되면서 고배당과 안전 위주의 경영을 바라는 외국인 주주의 비중이 늘어났고, 이는 기업의 적극적 투자를 어렵게 만들었다. 적대적 인수합병의 자유화로 인해 기업은 경영권 보호가 절실해졌고, 따라서 과거 같으면 투자에 썼을 자금도 현금으로 보유해 ‘유사시’에 대비하고 있다. 제조업체의 현금예금이 사상 최대치인 것이 그 증거다.

금융자유화로 인해 기업이 안전한 소비자 금융에 치중하고 기업금융을 기피하게 되면서 차입을 통한 기업투자자금의 조달이 어려워졌다. 또 기업부채를 무조건 죄악시해 부채비율이 높은 기업에 여러 가지 불이익을 가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추진되면서, 기업들이 차입을 극도로 꺼리게 됐고 과감한 투자도 어려워졌다.

▼신자유주의적 구조개혁 부작용▼

이렇게 볼 때, 외환위기 이후 구조개혁 과정에서 도입된 여러 가지 정책과 제도들을 고치기 전에는 우리 경제의 조로증은 치유될 수 없다. 물론 고쳐야 할 정책과 제도 중에는 자본시장 개방 등 강대국의 압력 때문에 일방적으로 되돌리기 어려운 것들도 많다.

그러나 국내적인 합의만 형성되면 할 수 있는 일도 많다. 기업금융을 장려하는 방향으로 금융규제 정책을 수정하고, 부채비율이 높다는 사실만으로 기업에 불이익을 주는 법규들을 폐지하며, 국민연기금을 사용해 ‘국민 지분’을 만들어 국민경제에 중요한 기업의 경영권을 안정시켜 주는 것 등이 그러한 예다.

하루빨리 정책방향이 수정되지 않으면 우리 경제의 조로증은 더욱 악화되고 미래는 어두워질 수밖에 없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고려대 교환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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