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 은행가의 세계]기업 M&A 성사 ‘보이지 않는 손’

  • 입력 2003년 10월 16일 18시 08분


투자은행가는 기업고객들에게 신뢰감을 주고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아주 중요하다. 김경우 차장(오른쪽 두번째)이 채권발행을 의뢰한 고객들과 회의를 갖고 채권발행의 절차와 과정, 성공전략 등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김두영기자
투자은행가는 기업고객들에게 신뢰감을 주고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아주 중요하다. 김경우 차장(오른쪽 두번째)이 채권발행을 의뢰한 고객들과 회의를 갖고 채권발행의 절차와 과정, 성공전략 등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김두영기자
《“메릴린치에서 인턴사원으로 일할 때 초고속인터넷 회사인 A사를 B사에 파는 일을 맡았습니다. 이후 한국내 초고속인터넷 산업의 구조조정이 시작됐습니다. 1주일에 평균 100시간을 일하지만 제가 참여해 성사된 거래가 산업의 변화를 일으킨다는 점이 매우 매력적입니다.” JP모건 홍콩지사에 근무하는 김경우 차장(32)은 기업 인수합병(M&A)과 대규모 자금조달을 주선하는 투자은행가(Investment Banker)다. 김 차장이 최근 맡았던 일은 신한금융지주회사의 조흥은행 인수와 신한지주의 인수자금 조달. 인수대금 3조3000억원, 상환우선주 발행 1조6000억원의 초대형 거래였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에서는 구조조정을 위한 인수합병과 외국자본 유치가 활발하게 진행됐다. 하이닉스반도체 대우자동차 해태제과 외환은행 등 수많은 기업과 은행의 주인이 바뀌는 과정에서 보이지 않게 뒤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이 바로 투자은행가다. 이들은 이제 한국 기업금융의 주역으로 부상했다. 김 차장이 전하는 투자은행가의 세계는 이렇다.》

▽M&A, 기업 자금조달 전담=투자은행가의 역할은 크게 정부와 기업의 대규모 자금조달과 인수합병으로 분류된다. 한국이 수십억달러의 외국환평형기금채권(외평채)을 발행하며 외환위기를 극복할 때 외국인투자자 섭외와 국가설명회(IR) 준비, 가격협상, 채권판매 등을 도맡았던 곳도 미국계 투자은행이었다.

한국은 금융시장 규모가 작기 때문에 대기업이 수천억원대의 회사채 또는 주식을 발행할 때 뉴욕 홍콩 런던 등 해외시장으로 나간다. 투자은행은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해 여기에 필요한 모든 실무작업과 전 세계의 기관투자가를 끌어모으는 일을 맡는다.

다른 하나의 큰 역할은 M&A 중개다.

규모가 큰 M&A는 매수자 매도자 모두 투자은행을 재정자문사로 선정한다. 자산부채 실사, 기업가치 평가, 가격협상과 같은 실무작업은 투자은행이 앞장을 서 조율하고 고객은 뒤에서 최종 의사결정을 내리는 방식으로 일이 진행된다.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는 모건스탠리, 하이닉스반도체 해외매각 시도는 씨티그룹 글로벌마켓증권(옛 살로먼스미스바니)이 맡았다. 국내 기업간 대형 M&A도 국내 증권사가 아닌 외국계 투자은행이 자문사를 맡는 경우가 많다. LG-호남석유화학의 현대석유화학 인수에는 JP모건의 역할이 컸다.

▽일도 많고 연봉도 높고=투자은행이 선망의 대상이 된 것은 일에 대한 매력과 함께 높은 연봉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투자은행이 대형 M&A를 주선하면 거래금액의 일정부분을 수수료로 받는다. 거래가 활발할 때는 3∼5%까지 받았으나 최근에는 1∼3%까지 떨어졌다.

회사는 직원들의 기여도를 평가하고 연말에 특별보너스를 지급하는데 회사 실적이 좋을 때는 상당한 금액을 받는다. 97년 이후에는 아시아지역에서 한국이 최고 시장으로 떠올랐다. 많은 연봉을 받는 만큼 노동강도는 아주 세다. 오전 8시30분에 출근해 밤 12시까지 일하는 것은 흔한 일이며 가격협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새벽 2, 3시는 기본이며 밤샘도 자주 한다.

김 차장이 조흥은행 M&A건을 맡았을 때의 일이다. 오전 8시반에 출근해 다른 업무를 처리하다가 서울 출장을 가라는 말을 듣고 오후 4시30분 서울행 비행기를 타고 9시30분 서울에 도착했다. 비행기를 타는 동안 관련 자료를 검토하고 서울 도착후 곧바로 JP모건 서울지사로 직행해서 새벽 2시30분까지 회의를 하고 호텔에서 잠을 잔다. 다음날 아침 8시30분 다시 사무실로 출근한다. 이런 생활을 자주 반복하기 때문에 가끔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가기도 한다. 그러나 성과가 좋지 않으면 쉽게 해고될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업계에서는 ‘고위험 고수익(High Risk, High Return)’의 원칙이 적용되는 시장이라고 말한다.

▽투자은행가가 되려면=대부분 의사소통이 영어로 이뤄지기 때문에 유창한 영어실력은 기본이다. JP모건 서울 홍콩지사도 어렸을 때부터 미국에서 자란 재미교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김 차장처럼 한국에서 대학까지 졸업한 토종 한국인은 몇 명 안 된다.

그는 대학졸업 후 P&G, 코카콜라, GE캐피탈 등 외국기업 한국지사에 근무했으며 미국 와튼 경영대학원(MBA) 과정을 마치고 작년에 JP모건에 입사했다. 영어와 친숙한 생활을 한 김 차장도 아직 영어 때문에 고생이 많다고 한다.

김 차장은 투자은행가의 성공요건으로 △팀 정신 △헌신성 △창조성을 꼽았다. 모든 일은 4∼6명으로 구성된 팀 단위로 움직이기 때문에 팀원으로서 협조하며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

또 M&A 협상에 있어서 상대방의 논리를 맞받아칠 수 있는 대응논리와 참신한 협상안을 만들어내는 창조성이 필요하다. 김 차장은 투자은행가를 준비하는 대학생들에게 영어실력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논리정연하게 전달하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어떤 사안에 대해 상대방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회계와 재무관리는 기본입니다.”

김두영기자 nirvana1@donga.com

▼국내서 활동중인 외국투자은행▼

외국계 투자은행의 역할이 눈에 띄게 부상한 것은 한국이 97년 외환위기를 맞으면서부터다. 수많은 기업 인수합병(M&A), 해외주식예탁증서(DR) 및 해외채권발행 등은 외국계 투자은행의 몫으로 돌아갔다. 이들은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해 외국자본이 한국시장에 진출하는 창구 역할을 맡았다.

JP모건은 95년부터 한국정부와 기업, 금융회사가 140억달러(약 16조원)의 채권을 발행하는 업무를 맡았다. 올해는 대우조선해양의 2억4000만달러, INI스틸의 1억달러 해외DR발행을 성사시켰다. M&A 부문에서는 신한금융지주의 조흥은행 인수, LG-호남석유화학 컨소시엄의 현대석유화학 인수 등을 성사시켜 주목을 받았다.

모건스탠리는 최근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작업을 총괄했으며 조흥은행을 신한금융지주에 파는 역할을 맡았다. 또 하나은행의 서울은행 인수와 롯데그룹의 동양카드 인수에 관여했다.

골드만삭스는 한국정부가 외국환평형기금채권을 발행할 때 많은 기여를 했으며 옛 국민-주택은행 합병작업에 참여했다. 예금보험공사가 서울은행을 팔 때와 우리은행이 현대석유화학을 팔 때 매도자측의 자문사를 맡았다.

씨티그룹 글로벌마켓증권은 회사명을 바꾸기 전 하이닉스반도체의 회생을 위한 재정자문사를 맡으며 부각됐다. 해외DR 1조5000억원 발행을 비롯해 마이크론테크놀로지와의 M&A 협상을 주도했으나 하이닉스 주가가 폭락하고 M&A협상이 무산되면서 시장영향력이 약해졌다.

메릴린치는 M&A보다는 채권발행 업무에 주력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투자은행 업계는 미국계 회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나 유럽계 회사로는 UBS증권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은행이 SK네트웍스 채무조정과 관련, 해외채권단과 협상을 벌일 때 재정자문사를 맡았다. 한편 국내 회사에서는 삼성 LG증권이 투자은행 업무를 강화하고 있으며 하나은행 투자은행팀과 하나증권 기업금융팀이 결합한 하나투자은행그룹(IBG)이 눈에 띈다. 국내 증권사는 글로벌 네트워크가 형성되지 않았고 기업조사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외국계 투자은행과 직접 경쟁하기에는 아직 역부족인 상황이다.

김두영기자 nirvana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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