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면 빚 깎아주는데 제때 갚을 필요 있나요"

  • 입력 2003년 10월 20일 17시 44분


A은행 대출담당자 박모 대리는 4개월째 500만원의 신용대출을 갚지 않고 있는 자영업자 장모씨(44)에게 며칠 전 독촉 전화를 걸었다가 황당한 일을 당했다.

2001년 7월 이 은행에서 1000만원을 대출받은 장씨는 올 6월 500만원을 갚은 이후 지금까지 나머지 대출금을 연체하고 있다.

‘왜 돈을 갚지 않느냐’는 박 대리에게 장씨는 “국민은행이 원리금을 50%나 감면해 준다는데 나는 안 깎아주느냐”고 묻는 등 채무탕감에 대한 질문만 늘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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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리가 “큰돈도 아닌데 웬만하면 갚으라”고 재차 요구하자 장씨는 “조금 더 기다려보라”며 전화를 끊었다.

20일 금융계에 따르면 금융기관들이 앞 다투어 신용불량자의 빚 탕감에 나서면서 갚을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대출금이나 카드대금을 내지 않고 버티는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가 확산되고 있다.

은행 카드사 등에는 이미 돈을 갚은 사람들이 항의 전화를 걸어오는가 하면 정상적인 채무자들에 대한 채권 회수도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B카드 채권추심담당 부서는 자산관리공사가 카드사로부터 인수한 부실 카드채권에 대해 원리금의 70%를 감면해 준다는 소식이 알려진 뒤 전국의 영업점 직원들과 고객들의 문의 전화가 빗발쳐 며칠째 정상적인 업무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이 회사 관계자는 “고객들은 자신들의 밀린 카드대금도 자산관리공사에 매각됐는지를 주로 문의해오고 있고 영업점 직원들은 카드대금을 깎아달라는 고객에게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본점에 지침을 달라고 요구한다”고 전했다.

또 이미 연체대금을 납부한 고객들로부터 ‘왜 원리금을 전혀 감면해주지 않았느냐’고 항의하는 전화도 많다는 것.

은행권에서는 국민은행이 연체 대출금의 원금을 감면해 주는 데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C은행 관계자는 “은행들이 상각 처리한 대출금에 한해 예외적으로 원금을 깎아주는 경우는 있었지만 일반 연체 대출의 원금을 감면하는 것은 국민은행이 처음”이라며 “제때 대출금을 갚는 고객과의 형평성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고 말했다.

카드사들도 자산관리공사가 10∼20%의 가격에 부실 카드채권을 매입해서 원리금의 70%를 깎아주겠다고 발표하는 바람에 정상적인 회원들로부터 ‘차별대우’라는 항의를 받고 있다고 호소하고 있다.

한국금융연구원 임병철(林炳喆) 연구위원은 “신용불량자를 지원하되 도덕적 해이 문제를 차단할 수 있도록 충분히 갚을 능력이 있는 악덕 채무자가 ‘무임승차’하는 사례를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동국대 법대 이상영(李商永) 교수도 “원리금 70% 감면 등 과도한 지원은 내년 총선을 의식한 선심성 정책이라는 의심을 받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신치영기자 higgledy@donga.com

차지완기자 c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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