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투자에 약하다.’
‘큰돈 관리는 남자가 해야 된다.’
한국 사회에서 ‘여자가…’로 시작하는 수많은 편견 중에는 금융 문제와 관련된 것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자산관리에서 남성이 ‘주인공’이라면 여성은 남성을 돕는 ‘조연’의 역할이다. 여성과 금융을 멀리 떼어놓는 유교적 편견과 오해는 아직도 한국 사회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여성의 금융 자립의식 형성에 커다란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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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자산관리의 ‘행동대원’인가=결혼한 지 8년 된 전업주부 김모씨(37)는 남편 월급 320만원에서 매달 150만원씩 적금과 보험에 붓고 있다. 어느 금융 상품을 고르는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책임. 그러나 일단 목돈이 만들어지면 그는 남편에게 통장을 건넨다. 그 돈을 어디에 투자하느냐에 대한 결정은 남편의 몫이다. 그는 “남편과 종종 상의하기는 하지만 최종 결정은 남편이 내린다”면서 “어쨌든 남편이 열심히 번 돈 아니냐”고 반문했다.
최근 여성개발원 조사에 따르면 여성이 ‘돈 관리’를 하는 가정은 69%에 달하고 있다. 그러나 여성이 지출관리를 책임지는 수준은 ‘실행자’의 역할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서울대 소비자학과 조사에 따르면 자산관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정보수집’과 ‘계획 및 결정’ 단계에서는 남성 주도 또는 부부 공동 책임이 60∼70%를 차지하는 반면 ‘실행’ 단계에서는 여성주도가 45%로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이 자산운용의 ‘행동대원’에 머무는 것은 가계의 주 소득원이 남성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기혼 여성의 취업 비율이 50%를 넘고 있지만 아직도 가계소득의 중심은 남성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그러다 보니 대다수 가정에서는 생활비 관리는 여성이 책임지고 부동산, 투자, 재산증식에 관련된 지출에서는 남성의 결정 비중이 높은 양분적 구조가 자리 잡고 있다. 여성개발원 조사에 따르면 배우자와 상의하지 않고 처분할 수 있는 재산의 규모는 남성이 평균 1261만원, 여성은 437만원으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우재룡 한국펀드평가 사장은 “여성 자신이 ‘돈은 남성의 것’이라는 사회적 편견에 사로잡혀 경제적 의사결정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하는 측면이 강하다”고 지적했다.
▽편견 타파는 금융교육에서부터=이모씨(56)는 3년 전 사별한 남편으로부터 10억여원의 재산을 물려받았다. 확정금리 상품 2, 3개와 개인연금에 가입했을 뿐 그의 재산은 고스란히 은행 금고에서 잠자고 있다. 재무설계사가 연 10∼13%의 수익률을 보장하는 장기 해외펀드에 가입할 것을 권하고 있지만 이씨는 고개를 흔들고 있다. “집에서 살림만 하던 사람이 무슨 투자를 하겠느냐”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여성이 투자에 소극적인 것이 타고난 성향 때문인지, 금융지식을 습득할 기회가 적어서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2001년에 55세 이상 남성과 여성의 직장연금 투자 사례를 살펴본 미국 미시간 주립대 레슬리 팝케 경제학과 교수는 “성별에 따른 투자행태의 차이를 발견하지 못했다”면서 “남성이든 여성이든 투자 노하우가 없으면 위험을 회피하고 신중해지기 마련”이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평균적으로 한국여성의 금융지식 수준이 남성보다 낮기는 하지만 금융교육의 기회는 오히려 여성에게 더 넓게 열려 있다고 지적한다. 대다수 남성이 직장에서 단편적인 투자 정보를 얻는 것과는 달리 여성들이 투자교실, 언론 등을 통해 자산관리 교육을 받을 기회가 더 많다는 것이다.
결혼 3년차 윤모씨(31)는 주변에서 ‘재테크 아줌마’로 통한다. 남편 친구들은 집에 놀러오면 남편보다 윤씨 옆에 우르르 모여앉아 “요즘 배당주펀드가 유망하다던데…” “노후자금은 언제부터 마련해야 되나” 등의 질문을 쏟아낸다. 윤씨는 결혼 초 남편과 동일한 액수의 자금으로 시작한 투자 게임에서 월등히 높은 수익률을 올렸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투자공부를 시작했다.
“남성보다 정보습득에 느린 여성은 투자 얘기만 나오면 위축되기 마련이죠. 처음엔 저도 남편으로부터 ‘여자가 집안 살림이나 잘하지’ 하는 핀잔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지식이 쌓일수록 남편은 자산운용 계획을 세울 때 저를 동등한 자격의 ‘파트너’로 인정하며 최대한 의견을 존중해 줍니다.”
정미경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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