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자원부에서 요직에 기용되기 위한 조건들이다. 다른 부처라고 그런 덕목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산자부에서는 유달리 강조된다.
임채민(林采民) 국제협력투자 심의관은 “산자부는 규제 등 권력수단이 없으므로 뛰어다니면서 일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경제부처 중 가장 개방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산자부의 조직문화는 이런 ‘생존환경’ 속에서 형성됐다. 산자부의 전신인 상공부는 과거 재무부 경제기획원 등과 함께 ‘빅3’ 부처로 불렸다.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이 수출입국을 강조하던 시절 상공부의 힘은 막강했다. 상공부의 도장을 받지 않고는 기업이 수출도 수입도 할 수 없었다.
당시 상공부 상역(商易)국장은 재무부 이재국장,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장, 내무부 지방행정국장, 치안본부 치안국장 등과 함께 정부 5대 국장으로 불렸다.
그러나 80년대 중반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김영학(金榮鶴) 총무과장은 “정부 규제가 사라지면서 상공부는 거의 모든 권한을 잃었다. 허가를 해주며 산업을 이끌던 곳이 ‘기업(산업) 서비스센터’로 바뀐 셈”이라고 말했다.
권한은 사라졌지만 부처의 규모는 여전하다. 93년 상공부가 동력자원부와 통합했기 때문이다. 산자부 정원은 1029명으로 경제부처 가운데 가장 많고 국회 국정감사 대상인 산하기관만 36개에 이른다.
산자부 사람들은 스스럼없이 산자부를 ‘열린 부처’라고 자임한다. 행정고시 출신의 한 초임 사무관은 “정부 부처 가운데 산자부보다 실물경제와 가깝고 열려 있는 조직이 있나요”라고 되묻는다. 2001, 2002년 행시 일반행정직 수석합격자가 모두 산자부에 지원한 것도 그런 특성과 무관치 않다는 게 자체 분석이다.
‘열린 사고’ 때문인지 재정경제부 기획예산처 등과 달리 ‘인맥’도 거의 없다. 기술표준원장을 제외한 1급 이상 7명 가운데 서울대 출신은 1명도 없다. 고려대 1명, 연세대 3명, 성균관대 2명, 경북대 1명 등으로 출신 학교부터 각양각색이다.
장관도 외부 출신이 많다. 최근 10년간 부임한 11명의 장관 중 산자부(상공부) 출신은 4명뿐. 일각에선 산자부의 힘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기도 하지만 산자부 관계자들은 이 같은 개방성이 상공부 시절부터의 유습이라고 설명했다. 오영호(吳永鎬) 산업기술국장은 “상공부 시절엔 자고나면 자리가 하나씩 생긴 탓에 외부 인사의 영입에 거부감이 적었다”고 말했다. 대부분 국장급인 행시 23, 24기의 20명 가운데 상공부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사람은 2명뿐일 정도다.
국장급 자리 가운데 산업정책국장 산업기술국장 무역정책심의관 자본재산업국장 생활산업국장 등은 옛 상공부 조직이고 자원정책국장 에너지산업심의관은 옛 동자부 조직. 그러나 지금 산자부 내에는 부처 출신 구분이 거의 없다. 동자부의 규모가 상공부의 3분의 1밖에 안돼 자연스럽게 흡수됐기 때문이다.
산자부에서는 연공서열(고시 기수)에 일반적인 능력만 갖추면 과장급까지는 무난히 승진할 수 있다. 그러나 국장급이 되려면 다면평가를 통과해야 한다. 별 권한이 없는 조직을 이끌기 위해서는 친화력과 탈(脫)권위가 필요한데 이것이 다면평가에 반영된다는 얘기다. 한 사무관은 “카리스마가 강한 사람은 부하직원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분위기”라고 소개했다.
김칠두(金七斗) 차관 아래로 金鍾甲(김종갑) 차관보, 박봉규(朴鳳圭) 무역투자실장 등 최고위직 상당수가 소탈한 성격의 소유자인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사무관들이 유학이나 연수를 떠나기라도 하면 선배 국·과장들이 가족들의 해외적응 요령까지 알려준다.
김대중(金大中) 정부 초기 산자부로서는 보기 드물게 대규모 인사파동이 있었다. 당시 특정지역출신 편중 인사가 논란이 되는 가운데 김균섭(金均燮) 기획관리실장, 구본용(具本龍) 공보관, 이우석(李愚錫) 총무과장, 박용찬(朴墉燦) 전자상거래지원과장 등 주요 간부들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산자부를 떠난 것.
임 심의관은 “당시 인사파동은 정치적 배경이 작용됐기 때문이라는 비판이 있었다”며 “분위기가 자유로울수록 동료 선후배들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이 승진해야 뒷말이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은우기자 lib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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