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는 자동차산업 종사자 수십만명이 연일 모여 시위를 한다. 중소 부품업체 사장들은 국민 세금으로 거액의 FTA 피해 보상금과 지원 대책을 마련해 달라며 정부 청사 앞에 드러눕는다.
한일 FTA 협상이 본격화됐을 때 벌어질 수도 있는 일이다.
일본이 어떤 나라인가. 자동차는 물론 전자 기계 부품 소재 등 거의 모든 제조업 분야에서 한국보다 우월한 경쟁력을 지닌 나라다. 한일 FTA가 체결되면 도산하는 업체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은 연내에 한일 FTA 협상을 시작하기로 했다. 더 이상 문을 닫고 있다가는 앉아서 고사(枯死)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현재 세계무역기구(WTO) 148개국 가운데 FTA를 한 건도 체결하지 못한 나라는 한국 몽골 등 6개국에 불과하다. 다자(多者)협상이 난항을 겪고 세계 시장이 FTA로 포위되면서 한국은 이미 사방에서 피해가 늘고 있다. 칠레 멕시코 동남아국가연합(ASEAN) 등 최근 다른 나라와 FTA가 발효된 나라들에서 한국의 수출 비중은 눈에 띄게 줄고 있다.
그동안 FTA에 소극적이었던 일본과 중국도 ASEAN 멕시코 캐나다 등과 FTA를 추진하고 있다. 이런 환경에선 한국 경제의 70%를 차지하는 수출은 갈수록 줄고 통상 협상력은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구한말 쇄국정책으로 문을 닫고 있다가 결국 외국의 식민지가 된 것처럼 한국은 지금 ‘경제적인 구한말’ 위기에 봉착해 있다. 스스로 FTA를 주도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정면 돌파’만이 살길이다. 이 때문에 기업 피해가 두려워 망설이던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경제단체들도 최근 한일 FTA추진에 나서고 있다.
한일 FTA가 체결되면 사실은 피해 이상으로 더 많은 이익이 예상된다. 기술 이전과 일본의 대(對)한국 투자 증가, 농산물 수출 증대는 물론이고 한국 경제는 산업 구조조정과 생산성 향상으로 세계 어느 시장에서도 이길 수 있는 강한 체질로 거듭날 것이다. 나아가 이를 기반으로 한중일 FTA, 아세안과 FTA를 맺음으로써 북미와 유럽에 맞설 거대 경제권의 주도국이 될 수 있다. 수출로 한강의 기적을 이룩했듯이 동아시아 단일 경제권은 21세기 한국 경제 성장의 동력이 될 것이다.
갈 길은 이처럼 먼데 현실은 답답하기 짝이 없다. 1998년부터 추진해 온 한-칠레 FTA가 5개월째 국회 비준을 못 받고 표류하고 있다. 국회의원들은 국익에는 관심이 없고 정치자금수사다 신당이다 의원 배지와 표밭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극단적 자유시장 경제 논리로 말하면 한국 농업은 정부가 그동안 과잉 보호해서 경쟁력을 잃었을 수도 있다. 값싼 칠레 포도가 들어오면 한국 농가는 유기농 과일, 농장에서 과일과 레저를 함께 즐기는 프로그램 등을 개발할 수 있다. 칠레 일본 중국의 부유층을 대상으로 더 맛있는 한국 포도를 수출할 수도 있다. 농민 단체들도 이젠 국민 세금만 요구할 게 아니라 FTA로 더 부유해질 도시의 돈을 어떻게 농촌으로 끌어들일지 스스로 궁리해야 한다.
FTA 비준을 더 이상 늦춰서는 안 된다. 언제까지 눈앞의 이해 조정에 실패해 한국이 공멸하는 길을 고집할 것인가.
신연수 경제부 차장 ys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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