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그룹들이 대규모 공채를 없앴다고는 하지만 대기업 계열사, 외국인 회사 등 대부분 회사가 인재를 뽑는 시기는 대학 졸업생이 배출되기 전인 바로 요즘이다.
극심한 취업난 속에서 구직자들은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칠 ‘합격 비법’을 찾아 헤매고 기업들은 그럴듯하게 잘 포장된 응시생들 가운데 진짜 인재를 골라내기 위한 채용 기법 개발에 여념이 없다.
자기소개서, 필기시험, 인성검사, 역량검사, 1차 면접, 2차 면접…. 후보자는 많고 취업문이 좁을수록 기업이 들이대는 잣대는 정밀하고 다양해진다. 빽빽이 놓여있는 이 장애물들을 뛰어넘기 위해 구직자들은 단순히 스스로를 홍보만 해서는 안 된다. 과장되거나 모호한 정보는 반드시 걸러지기 때문이다. 이제는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
●좋은 자기증명, 나쁜 자기증명
중견그룹 이랜드는 지난달 말 입사지원서를 받았다. 자격요건은 간단하면서도 어려웠다. 패션영업관리, 전략기획 등 7가지 지원분야를 나누고 그 분야에서 발휘해야하는 역량을 과제로 제시했다. 신입과 경력을 불문하고 구직자들은 지원하는 분야와 그 과제를 선택해 분석 자료를 제출해야 했다. 분량은 2MB이내. 그림을 넣지 않을 경우 파워포인트로 A4용지 100장쯤 된다.
‘○○년 ▽▽대학 졸업, 서울 강남 출생. 자애로운 부모님 밑에서 △남△녀의 ☆째로 태어나…’에 익숙한 사람들은 기절할만한 자기소개서 형식과 분량이었다.
이랜드는 이 같은 자기증명을 거친 사람들을 대상으로 1 차례 면접만 치른 뒤 합격자를 뽑을 예정이다. 서류 접수결과 총 20명 모집에 900명이 지원했다. 이 회사는 입사 지원자 중 자기증명이 뛰어난 사람이 많으면 채용인원을 90명까지 늘릴 용의도 있다.
위크엔드팀은 당초 서류 전형 결과 발표 예정일이던 7일 이랜드를 찾아가 서류전형에서 통과가 유력시 되는 지원서와 탈락이 유력시 되는 지원서를 들여다봤다.(지원자가 많아 서류전형 발표는 14일로 미뤄졌다)
좋은 자기증명서는 과제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구체적인 숫자와 근거를 제시했다. 자신의 경험을 서술해도 정보가 구체적이었다. 반면 탈락할 것이 명백한 자기증명서는 ‘저는 열심히 할 것입니다’는 식으로 모호한 다짐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한 지원자는 상품기획 부문의 과제 중 ‘이랜드를 제외한 타사 브랜드 1개를 선택해 상품군 포트폴리오를 분석, 제출할 수 있다’는 항목을 선택했다. 이 지원자는 파워포인트로 꾸민 35장짜리 자료를 통해 J사의 캐주얼브랜드 B에 대해 분석했다. 올 상반기 의류시장의 규모를 한국패션협회 자료를 바탕으로 원통형 백분율로 표시했고 샐러리맨이 양복+넥타이가 아니라 캐주얼을 선호하는 추세를 소개하기도 했다. 이 지원자는 B가 고급 캐주얼브랜드 구축전략을 통해 좋은 브랜드로 입지를 다졌지만 보다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1위 자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결론을 제시했다. 그는 서류전형을 통과했다.
패션생산을 지원한 다른 사람은 ‘7일 안에 반응생산을 할 수 있는 지식을 제출할 수 있다’는 과제를 선택했다. 제조 공정의 흐름도를 작성하고 경영환경의 변화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줬다. 기획, 생산, 유통판매 등 각 분야에서 반응생산을 할 수 있는 전략을 서술한 뒤 결론을 도출했다. 그는 통과될 가능성이 높다.
반면 전략기획을 지원해 ‘혁신과 기업가 정신에 따른 차별화된 사업설계 능력이 있다’는 과제를 선택한 사람은 첫 장부터 “기획력이 힘입니다. 저는 귀사에서 잘 해낼 자신이 있습니다”는 다짐으로 시작했다. 그는 대학시절 참여한 프로젝트 이름을 나열한 뒤 어떤 프레젠테이션에서 1위를 차지했다는 정보만 적었다. 팀 안에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이고 어떤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
또 다른 지원자는 전략기획에서 ‘국내 기업 중 임의로 3개사를 선정해 해당 회사의 매출 및 현금흐름 투자수익률을 향후 3년간 30% 성장시킬 전략을 제안할 수 있다’는 과제를 택했다. 전체 서술 가운데 ‘2차 금융상품’ ‘전략 1,2,3’이라는 표현을 제외하고는 숫자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근거 없는 주장만 있었던 셈. 두 지원자는 서류전형에서 탈락했다.
(모델=김상준, 김윤진씨, 한국방송아카데미 재학생)
●면접관 사전교육도 철저
이진 이랜드 채용팀장은 “지원율이 몇 대 몇인가에 따라 회사의 가치가 결정되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요즘 같은 구직난에는 제대로 일할 사람만 지원받아 좋은 사람을 뽑는 추세다. 허수(虛數)와 이지 플라이어(쉽게 회사를 옮기는 사람)를 배제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고안해 내는 것이 채용의 성공요인”이라고 밝혔다. 자기증명 방식의 채용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랜드처럼 서류전형에서는 아니지만 면접을 통해 자기증명을 요구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삼성 LG CJ 등 대부분 대기업과 신한은행 등 은행권이 단답식 면접질문에서 벗어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방식의 면접 기법을 도입하고 있다. 순간의 기지로 이야기를 지어냈다가는 결국에는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는 방식이다.
채용의 기법이 정밀해지면서 아무나 면접관이 될 수는 없게 됐다. 일부 기업에서는 예비 면접관들에게 예상 면접질문에 대한 대답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교육을 실시한 뒤 ‘적격자’들을 면접현장에 내보낸다. 임원들의 ‘감(感)’에 합격자 판단을 맡겼던 예전에 비하면 상당히 과학적이다.
최양기 CJ㈜ 인사팀장(상무)은 “면접관의 감만으로 판단할 경우 인재를 제대로 평가하는 정확도는 1을 기준으로 0.1∼0.3밖에 안된다. 새로운 평가기준을 만들어내는 이유는 정확도를 1에 가깝게 올리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자기증명을 통해 역량을 파악해 제대로 된 사원을 뽑을 경우 이직자나 퇴사자가 0%에 가깝다는 게 기업들의 이야기다.
응시자는 이런 ‘그물망’을 통과하기 위해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해서 대답을 내놓아야한다. 학력, 재력 등 배경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곳이 많다. 회사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사전 조사하고 홈페이지나 뉴스를 통해 최신 트렌드를 파악했을 경우 의도에 다가가기 쉽다.
예를 들어 LG CNS에서 ‘프린터의 토너가 떨어졌을 경우 어떻게 하겠는가’라는 질문을 했다면 응시자는 “예전에 직접 갈아본 경험이 있고 앞으로도 내가 하겠다”는 응답을 내놓아야 한다. 강경원 인사 경영지원 부문 과장은 “토너를 갈 수조차 없으면 정보통신(IT)업계에 취직하기에는 자격미달”이라고 말했다.
이랜드의 경우 자기증명 뒤에 붙여진 문답자료를 통해 회사에 필요한 인성을 지녔는지를 파악했다. 질문 가운데 ‘후배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 3권을 중요한 순서대로 적어라’는 항목이 있었다. 전략기획에 응시한 한 사람은 ‘구영탄 시리즈’라는 만화책,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적었다가 낮은 점수를 받았다.
이진 팀장은 “적어도 비즈니스맨이 되겠다는 사람이면 경제 경영 관련서적을 적어냈어야 한다. 자신의 특색 있는 능력을 쓰라는 항목에는 ‘숫자감각’ ‘계획하고 조직하는 능력’ 등을 쓰는 게 좋다”고 지적했다.
●비법은 없다
극심한 취업난은 새로운 풍속도를 만들어내고 있다. 취업을 앞둔 학생들 사이에 ‘빨간 책’ ‘파란 책’ 열풍이 불고 있다. 빨간 책은 ‘최신 직무적성검사’라는 제목의 빨간 표지가 인상적인 책. 파란 책은 ‘2004 종합 직무적성검사’라는 책. 둘 다 삼성 LG 등 대부분 대기업의 기출 인터뷰, 인적성 검사 문제, 면접의 노하우 등이 담겨있다.
인터넷에서는 ‘면접 필승 카페’등 모임이 수백 개 생겨 면접 때 나온 질문과 전략을 올려놓는다. 인터넷을 통해 ‘면접 스터디’ 모임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광범위한 정보가 교류되고 있지만 큰 도움은 되지 않는다는 게 인사담당자들의 지적.
최양기 상무는 “예전에는 빨간책이라면 포르노 책이었는데 지금은 취업참고서”라며 “이런 기출문제는 아무리 봐야 소용이 없다. 자신이 직접 돈도 벌어보고, 프로젝트도 수행하는 등의 경험이 없는 상태라면 문제만 알고 있다고 정답을 내놓기는 어렵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많은 기업들이 회사 단위가 아니라 마케팅, 홍보 등 구체적 업무를 단위로 인력을 뽑는 추세도 ‘비법’을 무색하게 하는 요인이다. 회사마다 홈페이지를 통해 해당 업무에 대한 정보를 공개한다. 그러므로 이를 잘 파악하고 대비해온 사람들은 비법이 없어도 통과된다.
아직도 많은 구직자들은 하고 싶은 일과 잘 할 수 있는 일을 혼동한다. 공대생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마케팅을 지원하는 식이다. 이는 트렌드에 쉽게 쏠리기 때문이다. 2000년에는 IT업계가, 요즘은 엔터테인먼트 업계가 이력에 관계없이 각광받고 있는 것도 이런 현상이다. 능력을 개발하지 않고 유행만 좇다가는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진 팀장은 “하다못해 주식투자를 해도 회사를 방문해보는데 자신의 인생을 투자하려면 회사에 대해 제대로 알아봐야한다”고 조언했다.
글=하임숙기자 artemes@donga.com
사진=이종승기자 urises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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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질문 숨은 의도 뭘까?▼
면접을 준비하는 구직자들은 ‘어떤 옷을 입을까’ ‘어떤 표정을 지을까’ 등 사소한 것부터 신경이 쓰인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응답의 내용.
예전에는 당황스러운 질문을 통해 ‘순발력’을 알아보는 일이 많았다면 요즘은 알아보고자 하는 목표가 분명한 질문들이 많다. 단답형 보다는 서술형 질문이 많은 셈.
서술형이라고 무한정 설명을 길게 하면 안 된다. 결론부터 두괄식으로 말한 뒤 이에 대한 설명은 두 세 문장이면 충분하다. 어떤 기업에서는 1시간 넘게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20∼30분에 인터뷰가 끝나기 때문.
최근 사원 채용을 진행하고 있는 신한은행, 이랜드, CJ㈜, LG CNS의 인사담당자를 통해 면접에서 나오는 질문에 어떤 의도가 숨어 있는지 알아본다.
▽이성친구가 있나=단답식 질문. 숨은 의도가 없는 경우가 많다. 시간이 남았거나 짧은 시간 안에 피면접자의 역량을 최대한 끌어내려고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묻는 질문.
▽좋아하는 연예인이 있나, 잘하는 운동은 무엇인가=마찬가지로 의미 없는 질문.
▽(같은 과의 후보자 두 명이 동시에 지원했을 경우)누구를 뽑으면 좋겠는가=순간의 기지와 논리력을 보기위한 것. 피면접자를 당황케 하는 이런 ‘압박면접’은 요즘 줄어드는 추세.
▽e메일 아이디가 뭔가=이름으로 만들었으면 B. 지원하는 회사에 오래 전부터 관심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아이디면 A. 이런 질문은 당락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아도 가산점을 받을 수 있느냐 여부가 결정된다.
▽직장의 의미에 대해 말해보라=회사마다 평가가 다를 수 있다. 중시하는 가치가 다르기 때문. 대체로는 돈을 버는 곳이 아니라 내가 중시하는 이러저러한 비전을 이루는 곳으로 말하면 A. ‘자아실현을 위한 곳’처럼 천편일률적이거나 ‘돈을 벌기 위한 곳’처럼 다른 좋은 조건이 주어진다면 언제든 옮길 수 있는 사람처럼 보이면 C.
▽고객을 만나러 가야 하는데 상사에게 급한 지시가 왔다. 어떻게 하겠나=조직성, 성취지향성을 보는 질문. 상사에게 상황을 납득시키려 노력하거나 고객 관련 일을 동료에게 처리하도록 한다는 대답이 일반적. ‘고객우선주의’를 모토로 가진 기업이라면 고객을 더 중시한다는 응답이 높은 점수를 받을 수도 있다.
▽질문을 해 보세요=마지막에 흔히 묻는 질문. ‘꿀 먹은 벙어리’라면 감점. “최근 귀사가 ○○프로젝트를 진행한 걸로 알고 있는데 나중에 그것과 관련된 일을 해볼 기회가 주어질 수 있는가”라는 식으로 대답하면 A. 프로젝트명만 거론해도 회사에 대해 관심이 있는지 여부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
▽동아리에서 리더 역할을 해봤나=예전에는 리더십을 묻기 위해 단답형으로 이 같은 질문을 했으나 요즘은 이 질문에 관련된 질문이 10개 정도 더 붙어 있다. 리더로서의 고민, 주위의 평가, 스스로에 대한 평가, 이전 리더와 본인의 비교 등 실제로 해보지 않고서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 이어진다.
▽명절에 거래처에서 양주를 선물했다. 어떻게 하겠는가=도덕성을 묻는 질문. 정중하게 돌려보낸다가 정답인 경우가 많다. 인사담당자들은 “그 정도는 관례니 받고 그에 상응하는 답례품을 보낸다는 응답이 의외로 많다”고 전했다.
▽정보를 수집하고 그 정보에 의해 의사결정을 내린 적이 있는가=정보분석의 능력을 묻는 것. 보통 기획, 홍보 파트에 근무할 사람에게 필요한 역량이다. 대답을 하면 어떤 경로로 정보를 수집했나, 수집한 정보가 맞는지 틀리는지 어떻게 검증했나 등으로 질문이 이어진다.
▽팀별 과제를 할 때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결론을 도출한 적 있나=팀워크에 관한 질문. 팀에서 한 역할을 중심으로 설명해야 한다. 그 뒤에는 다른 사람의 일을 대신 한 적이 있는가. 팀 분위기를 해친 사람에 대해 어떤 역할을 했는가 등의 질문이 꼬리를 잇는다. 응답자의 상황이 단순했는지, 복잡했는지에 따라 같은 대답이라도 평가점수는 달라진다.
▽당신의 전문성을 높게 평가해 당신에게 도움을 요청한 사람이 있나=대인관계를 묻는 질문. 예전에는 ‘지금 부르면 달려올 친구 이름 셋을 대라’는 질문이 같은 질문. 도움을 요청한 사람이 있다면 어떤 사람인가, 의도적으로 네트워크의 폭을 넓히기 위해 어떤 일을 했는가 등이 이어질 수 있는 질문. ▽남이 주저했던 일을 본인이 앞장서 한 적 있는가=열정을 체크하는 것. 어떻게 헤쳐갔고, 남에게 어떤 도움을 요청했는지, 스스로 스케줄링을 어떻게 했는지 등이 이어진다.
▽지방에 가서 근무할 수 있나=어느 정도 합격선을 통과한 사람에게 하는 질문. 실무배치시 고민이 드러난다.
▽원하지 않는 부서에 근무할 수도 있나=마찬가지로 합격권에 든 사람에게 하는 질문. 하지만 최근에는 업무별로 직원을 뽑기 때문에 사라져가는 질문이기도 하다.
▽맞벌이 부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여성에게 묻는다면 역시 합격권에 든 케이스. 결혼 뒤 직장생활을 지속할지 여부를 판단한다.
하임숙기자 arteme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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