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이야기]러 “쇼핑중독 남의 일 아니네”

  • 입력 2003년 11월 13일 17시 12분


날씬한 몸매에 가무스레한 피부, 머리숱이 많은 가수 이효리(왼쪽)는 신장이 발달한 전형적 인물이다. 반면 머리숱이 적고 엉덩이와 허벅지가 큰 사람은 신장이 약한 사람이다. 탤런트 김을동(오른쪽)이 그러하다.동아일보 자료사진
날씬한 몸매에 가무스레한 피부, 머리숱이 많은 가수 이효리(왼쪽)는 신장이 발달한 전형적 인물이다. 반면 머리숱이 적고 엉덩이와 허벅지가 큰 사람은 신장이 약한 사람이다. 탤런트 김을동(오른쪽)이 그러하다.동아일보 자료사진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100여년 전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던졌던 이 질문에 러시아인들은 뭐라고 대답할까. 당시의 ‘정답’은 ‘물질이 아닌 정신’이겠지만, 지금은 ‘쇼핑중독증’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물질이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한다.

마케팅회사인 콤콘(Comcon)이 최근 평균적인 모스크비치(모스크바시민)들을 대상으로 여가를 보내는 방법을 조사했다. 결과는 TV시청과 쇼핑 독서의 순이었다. 여론조사 기관인 여론재단(FOM)의 이반 클리모프 박사(사회학)는 이에 대해 “요즘 러시아인들의 생활 방식이 급속히 서구화되고 있는 것”으로 해석했다.

전통적으로 러시아인들의 취미는 독서와 산책 공연관람 등이 꼽혔다. 책도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 등 고전을 주로 읽고 공연도 발레와 연극 오페라 등 ‘클래식’을 선호했다. 반면 유럽이나 미국인보다 TV시청 시간은 더 적었다. 오락기능보다는 선전도구로서의 역할이 강조됐던 방송은 내용도 단순했고 재미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러시아의 상업방송은 서방의 방송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TV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됐다.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몇 년 전만 해도 사전에도 없는 외래어였던 ‘쇼핑’이라는 단어가 이제는 생활 속에 깊숙이 파고든 현상이다.

러시아 민영 NTV는 최근 “러시아 여성들 사이에서 쇼핑중독증이 크게 늘고 있다”고 전했다. 정신과 전문의 알렉산드르 팔레예프 박사는 “10년 전 쇼핑중독증으로 나를 찾아온 고객은 단 1명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100명이 넘는 환자를 치료하고 있다”고 말했다.

10여년 전만 해도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은 ‘쇼핑중독’이라는 말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소련 시절에는 국영상점 안의 텅 빈 진열대와 길게 늘어선 줄이 ‘물건 사기’를 상징하는 풍경이었다. ‘물건 사기’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고 고통이었다. 그러니 ‘쇼핑’이 중독에 빠질 만큼 쾌락을 준다는 사실을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시장개혁이 한창일 때는 혼란을 틈타 엄청난 부를 모은 졸부들의 소비 행태가 화제를 모았다. ‘노브이 루스키(新러시아인)’라고 불리는 이들은 외국의 면세점과 백화점에서 100달러짜리 지폐를 한 움큼씩 쥐고 가격도 보지 않고 닥치는 대로 고가품을 사댔다. 체제전환기의 혼란과 경제난에 시달리던 대다수의 러시아인들은 이들에 대해 경멸과 적대감을 나타냈다.

그러나 ‘돈을 쓸 여력이 있는’ 중산층이 늘어나면서 쇼핑에 대한 인식은 너그러워졌다.

모스크바 중심가의 고급 화장품 상점인 리브고쉬(Rive Gauche).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등에 있는 15개 매장에서 샤넬 시세이도 등 외제 화장품만 판다. 2년 전 모스크바 1호점이 문을 열었을 때부터 일해 온 크세니야 콘듀코바 수석 매니저는 고객들의 소비 행태 변화에 대해서 묻자 “전보다 더 자주 오고, 더 비싼 것을 사고, 더 많이 산다”고 간단히 설명했다. 올해는 지난해에 비해 매출이 50%나 증가했다.

주요 고객은 근처의 직장에 다니며 점심시간이나 퇴근길에 들르는 20∼30대 여성들. 처음 가게 문을 열었을 때만 해도 생일이나 기념일을 맞아 남편이나 남자친구와 함께 와 선물을 고르거나, 모았던 돈으로 ‘큰마음 먹고’ 평소 갖고 싶었던 화장품을 사가는 손님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수시로 드나드는 ‘기분전환형’ 쇼핑이 늘었다고 한다.

구매력의 증가와 소비문화의 변화는 ‘쇼핑 열풍’으로 이어졌다. 최근 서방의 유통 메이저들이 다투어 진출하면서 모스크바에는 날마다 초대형 쇼핑몰들이 새로 생겨나고 있다.

지난해 모스크바 남부에 스웨덴의 이케아(IKEA)가 1만평 가까운 크기의 대형쇼핑몰을 열었다. “너무 커서 텅텅 비면 어떻게 하냐?”는 걱정은 매일같이 발 디딜 틈 없이 몰려드는 인파로 무색해졌다. 이케아의 대성공에 자극받은 프랑스의 아샨(Ashan)이 바로 옆에 대형할인점을 열자 도시순환도로가 하루 종일 교통체증을 일으킬 정도다.

최근에는 ‘세계 최대의 쇼핑몰’을 내세우는 크로크스 시티(Crocus City)가 2만평 규모의 쇼핑센터를 열어 ‘몸집 경쟁’은 무한대로 치닫고 있다.

이렇게 쇼핑할 곳이 늘어났는데도 러시아인들은 외국에 나가기만 하면 또 쇼핑을 한다. 올해 상반기에 500여만명이 외국에 나가 56억달러를 썼다. 작년 같은 기간보다 7.5% 증가했다.

쇼핑 대행인이라는 신종 직종도 생겨났다. 15명의 개인 고객을 갖고 있는 올가 이그나토바는 주문을 받고 파리 런던 밀라노 등의 고급상점을 다니며 ‘명품’을 사는 것이 일이다. 주문은 3000달러 이상만 받는다.

러시아의 이상적인 쇼핑 열기. ‘사고 싶어도 아무 것도 살 수 없었던’ 과거에 대한 보상욕구인가 자본주의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인가? 러시아 사회학자들에게 던져진 또 하나의 연구과제다.

김기현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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