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단과 LG그룹의 협상은 23일 낮까지만 해도 결렬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금융당국이 막판에 적극적인 중재에 나섬에 따라 24일 오전 10시로 다가온 채권단의 자금지원 여부 결정 최종시한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23일 밤 ‘대타협’을 이끌어냈다.
이에 따라 LG그룹은 구본무(具本茂) 회장의 ㈜LG 지분 등을 담보로 지원받은 2조원으로 LG카드 회생을 적극 추진할 수 있게 됐다. 현금서비스 등 LG카드의 영업은 바로 정상화될 전망이다.
채권단이 2조원의 자금지원을 최종 결정했지만 LG카드의 미래가 완전히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시장의 신뢰가 회복되지 않는 한 언제라도 위기가 재연될 수 있다는 것이 금융시장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정부의 적극 중재로 ‘극적 타결’=금융감독위원회는 23일 밤 8개 채권은행 행장과 부행장 등 최고책임자들을 일일이 서울시내 모 호텔로 불러 합의서에 서명할 것을 독려했다.
금감위 고위 당국자는 이날 밤 “마지막까지 은행들과 LG그룹간에 의견차이가 있었지만 양측이 금융시장 대란을 피해야 한다는 데 막판에 동의해 협상이 타결됐다”고 말했다.
금융당국은 22일까지만 해도 “LG카드 사태는 채권단과 LG그룹이 협상해 결정할 문제”라며 한 발짝 발을 빼고 있었다. 그러나 막판에 ‘시대에 뒤떨어진 관치(官治)금융’이라는 비판을 무릅쓰고 적극 중재에 나섰다.
이런 방향 선회는 사태를 방치할 경우 LG카드는 물론 금융시장, 나아가 한국경제에 엄청난 후(後)폭풍이 몰아칠 것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채권단이 대출금에 대한 구본무 회장의 연대보증이라는 마지막 조건을 철회한 것은 LG측의 반발이 워낙 거셌기 때문이다. LG측은 “구 회장이 경영권이 걸린 그룹지주회사 ㈜LG 지분을 내놓는 등 ‘주주의 출자범위 내 책임’을 뛰어넘는 파격적 결정을 했는데도 연대보증까지 요구하는 것은 개인대주주의 ‘무한책임’을 묻는 것으로 자본주의 원칙에 맞지 않는다”며 굽히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LG측은 “그룹 차원의 1조원의 자본 확충 외에 채권단으로부터 2조원만 대출받으면 LG카드를 살릴 자신이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또 채권단의 지원이 결정됨에 따라 사흘간 중지됐던 LG카드의 현금서비스도 24일부터 재개될 전망이다.
성병수(成秉洙) 교보증권 애널리스트는 “위기는 일단 벗어났다”면서 “일단 채권단 지원으로 유동성을 보완한 뒤 LG는 자본확충, 대환대출 금액감축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 내년 초까지는 갈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러나 채권단과 협상이 타결돼 2조원의 신규자금을 지원받는다고 하더라도 사태가 근본적으로 해결된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현재 LG카드는 자금조달 경색→자산 감소→영업 위축→적자 확대→자금조달 난항의 악순환에 빠져들어 있다. 자금지원을 받아 당장 부도위기를 넘긴다 해도 1조∼2조원의 추가자금이 필요하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9월 말 현재 LG카드의 총채무는 21조4000억원으로 총자산 26조540억원의 82.1%에 이른다.
LG카드가 추가자금을 채권발행이나 유상증자 등을 통해 시장에서 조달하려면 시장의 신뢰가 급선무다. 미래에셋의 한정태(韓丁太) 애널리스트는 “LG카드 정상화 관건은 은행권의 2조원 자금조달이 아니라 이를 지렛대로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되느냐에 있다”면서 “이를 위해서는 가급적 빨리, 그리고 많이 자본금을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또 이날 은행장들이 동의한 합의서 내용처럼 LG그룹이 내년 초까지 경영정상화에 실패한다면 문제는 복잡해진다. 구 회장의 LG카드 지분이 소각되고 채권은행이 2조원을 출자로 전환, 국내외 투자자에게 매각해 LG카드의 주인이 바뀔 가능성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의 책임과 과제=채권단의 자금지원 수락으로 일단 LG카드 문제가 ‘제2카드채 사태’로 확산될 가능성은 적어졌다. 그러나 사태가 이처럼 악화된 배경을 제대로 분석해 앞으로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이번 사태의 1차적 책임은 수익성을 무시한 ‘1등 전략’에 치중해 LG카드의 부실을 키운 LG그룹에 있다. LG는 최근 몇 년 동안 LG카드의 외형 확대에 엄청난 공을 들여 ‘카드업계 1위’를 자랑했으나 경영환경이 악화되면서 오히려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추가지원에 따라 LG카드 회생을 위한 그룹의 책임이 그만큼 무거워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정부의 ‘정책 실패’도 사태를 악화시킨 데 큰 영향을 미쳤다.
1999년부터 김대중(金大中) 정부는 내수 진작을 위해 신용카드 규제를 대폭 완화했다. 카드 활성화가 나름대로 의미를 지닌 정책인 점을 인정하더라도 문제는 정도가 너무 심했다는데 있다. 신용도가 낮은 고객에 대한 카드업체들의 무차별적 ‘거리 모집’이라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풍경’은 신용불량자 350만명이라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또 노무현(盧武鉉) 정부는 이번 LG카드 사태에서 드러났듯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기 직전까지도 문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초기 대응’에 실패했다.
한양대 경영학부 예종석(芮鍾碩) 교수는 “DJ정부가 내수 진작을 위해 사실상 신용카드 남발을 ‘방조’했던 만큼 정부도 ‘공범’이라고 할 수 있다”면서 “당장 급한 사태는 해결될 것으로 보이지만 사태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보완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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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현기자 sanjuck@donga.com
배극인기자 bae2150@donga.com
신석호기자 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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