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도, 국가지도자도 브랜드가 중요하다. 부시 대통령이 미국 그 자체가 아님에도 부시와 미국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 국민은 앞으로 4년 이상 ‘노무현 브랜드’를 안고 살아야 한다.
▼대통령 말빚 국민이 갚을수밖에 ▼
브랜드 가치는 믿음에서 나온다. 신뢰를 쌓거나 무너뜨리는 요인은 여럿이지만 언행일치가 핵심이다. 말만 있고 결과가 없으면 신뢰를 잃어 브랜드 가치를 기대할 수 없다. 더 나아가 그 말빚을 두고두고 갚아야 한다. 대통령의 말빚은 정치적으로는 자신이, 경제적으로는 국민이 갚을 수밖에 없다.
노 대통령은 지난주 럼즈펠드 미국 국방장관이 다녀간 뒤 청와대로 한국청년회의소 간부 500명을 불러 말했다. “10년 뒤, 아니 10년 안에 자주국방을 한다. 자주국가의 체면을 살리는 일은 내게 맡겨 달라. 나도 자존심이 있다.”
듣기에 근사하다. 하지만 노 대통령의 말이 너무 앞서 간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남의 보호나 간섭을 받지 않고 독립으로 행하는’ 자주는 한 개인도 쉽지 않다. 노 대통령이 웬만한 중소기업 규모도 안 되는 생수회사 장수천 문제 때문에 (또는 그 이상의 이유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기업가 강금원씨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도 그렇다.
노 대통령과 그 주변에서 ‘미국의 그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문하는 이른바 ‘자주파’ 그룹에 묻고 싶다. 궁극적으로 나라의 자주를 확보할 깊은 구상과 실천전략은 있는가. 10년 안에 자주국방을 하고 대통령이 자주국가의 체면을 살리도록 뒷받침할 부담 능력이 우리 국민, 우리 경제에 충분히 있다고 보나.
한미동맹보다는 민족공조가 가슴에 더 와 닿는다고 치자. 미군 재배치 비용, 전시작전권 회수 부담 등은 모두 국민 몫이다. 국군이 독자적인 대북 억제력을 가지려면 수십조원을 들여 무기를 더 도입해야 한다. 상당 부분은 미제 무기일 것이다. 미군 의존도만 줄인다면 미제 무기 의존도가 훨씬 높아져도 자주는 달성될까. 미국의 군산(軍産)복합체가 생각난다.
국방의 대미 의존도는 줄이고, 이를 메울 자주국방비를 국민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으면 방위능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저하된 단독방위능력으로 민족공조만 되뇌면서 버티는 건 자주국방이 아니라 무책(無策)국방이다. 자주파들이 아무려면 자주와 친북(親北)을 한 뿌리의 두 줄기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고 싶다.
경제의 자립기반을 잃고도 체제와 국방과 외교의 자주를 지켜낸 나라는 없다. 북한 정권은 자주할 능력을 상실하고, 수많은 주민을 굶주림과 죽음으로 몰아넣은 채 미국에 체제보장을 구걸하는 처지다. 자주의 원조쯤 되는 주체사상 낙원의 진면목이다. 그런데도 북한과 부둥켜안기만 하면 민족자존심이 살고 자주가 굴러올 것인가.
최근 들어 외국자본의 국내 대기업 경영권 확보 움직임이 집요해지고 있다. 재벌 기업들의 약점, 재벌의 공(功)은 외면하고 과(過)만 공격하려는 가학적 다중심리, 외자는 거룩하다는 집단착각, 이미 외자의 영향력에 운신이 불편해진 정부, 그에 따른 국내기업 역차별 등이 맞물려 있다. 그래서 국내 재벌 대주주들이 궁지에 몰리면 몰릴수록 관련 대기업의 지분을 갖고 있는 외국인의 경영권 장악 가능성은 높아진다. 이런 상황에서 토종 기업가의 모험정신이 되살아나고, 해외 아닌 국내 투자가 신나게 일어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국내자본가 냉대 어리석다 ▼
경제를 키우기 위해서는 외자도 절실하다. 하지만 부동산시장을 떠도는 수백조원과 대기업의 유보자금 등 국내자본은 생산적 투자에 끌어내지 못하면서 외자에만 목을 맨다면 우리 경제의 대외방어력은 더욱 급격히 떨어질 것이다. 최악의 경우 이 나라의 안보가 외국계 기업의 이해(利害)에 따라 춤추는 상황이 생기지는 않을까. ‘자주국가’의 체면이 살거나 죽는 일도 대통령 아닌 외국인의 처분에 맡겨지는 건 아닐까.
우리 기업과 기업인들의 자주성과 자존심을 다 죽여도 속만 후련하면 그만이라고 한다면 더 할 말이 없다. 그 다음에 이 나라가 맞이할 상황은 든든한 대통령과 고고한 자주파들이 감당해 주려나.
배인준 수석논설위원 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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