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두 사람 중 누가 현대그룹을 경영해야 하는지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고 있지 않다. 시삼촌과 조카며느리간 다툼이어서 도덕성에 대한 입방아도 있지만 이에 대해서도 예단하지 않는다. 누구든 지분이 많은 쪽이 지배한다는 것이 주식회사의 원칙이라고 믿고 있을 뿐이다.
‘기업은 수익 나는 일을 해야 하며 통일사업은 국가가 해야 한다’(KCC)는 견해와 ‘고 정 회장의 대북사업 유지는 계승해야 한다’(현대)는 주장이 맞서고 있지만 이 역시 기업의 주주들과 주총에서 선출된 경영진이 최종 선택해야 할 과제다.
현재 양측은 ‘법대로 하자’는 움직임이므로 현대그룹 지배권의 향방은 앞으로 법정에서 가려질 것이다.
그러나 양측이 지분 싸움을 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온갖 편법과 불투명 행위에 대해서는 논의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KCC는 지난달 현대엘리베이터 주식 40% 이상을 매집했다고 선언했으나 이 중 20% 이상은 뮤추얼펀드나 사모펀드로 산 것임이 밝혀졌다. 실명(實名)으로 사면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나기 때문에 편법으로 처리한 것이다. 이 때문에 금융당국은 제재하겠다는 태세이고 KCC는 제대로 의결권 행사를 못하게 될 것 같다.
KCC는 또 현대중공업 지분 8%를 사모펀드에서 몰래 갖고 있다가 올 6월에야 실명 전환한 사실도 드러났다. 정몽준(鄭夢準)씨 계열의 현대중공업 경영권을 지켜주느라 오래 전부터 비밀지분을 가지고 있었던 것. KCC는 현대그룹에서 계열분리하면서 상호출자는 다 털어낸 것으로 신고했지만 사실은 감독 당국과 투자자를 속여 온 것이다.
투자자들은 불투명한 경영 행태에 대한 실망감으로 KCC 주식을 팔아 치우고 있다. 특히 불투명에 대해서는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외국인들이 대거 매각에 나서 석 달 만에 외국인 지분이 32%에서 21%로 하락했다. 신용평가회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KCC의 장기신용등급을 ‘부정적 관찰대상’으로 지정한다고 지난달 18일 밝혔다.
현대그룹 창업자인 고 정주영(鄭周永)씨의 대선자금을 들먹일 것까지 없다. 현대가는 대북송금 사건에서도 편법과 탈법을 일삼았다. 송금 과정에서 드러난 위법 사항 때문에 특검이 시작됐으며 과거의 권력 실세들이 줄줄이 구속됐다. 대북사업의 민족적, 역사적 의의마저 크게 훼손됐다.
연초부터 한국 경제 전체가 홍역을 치렀던 SK그룹 사건도 고스란히 이 같은 불투명과 위법 관행의 결과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정치자금 및 기업 비자금 수사도 같은 성격이다.
솔직히 얘기하자. 이런 일들이 어디 현대만의 비밀이며 SK만의 약점일까.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대기업이니까 쉬 드러났고 먼저 매 맞는 것 아닌가. 한국 사회 전체를 친친 휘감아 옥죄고 있는 멍에 아닌가.
동아일보는 올 초 ‘신뢰경영’을 경제 지면 제작의 어젠다로 선택했다. 장기 시리즈와 각종 기획물을 통해 투명한 경영, 믿을 만한 회계, 올바른 기업지배구조를 목 터져라 외친 것은 과거 폐습과 잘못된 관행을 이제 제발 끊자는 취지다.
오늘은 2003년의 마지막 달이 시작되는 날이다. 2004년 이후에는 이 주제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흘러간 옛 노래’가 됐으면 하고 간절히 기도해본다.
허승호 경제부 차장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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