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포커스]와인과 비즈니스

  • 입력 2003년 12월 10일 18시 02분


#사례1=한 금융기관의 파리지점장인 P씨는 최고경영자(CEO)가 파리를 방문했을 때 관사로 초청, 와인을 곁들인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와인 전문가였던 CEO는 귀국 후 곧 그를 본국으로 소환했다.

‘레드와인을 내놓으면서 화이트와인 잔을 내놓았다’는 것이 인사 조치의 이유.

주변에서는 이 인사에 대해 말이 많았지만 CEO의 설명은 이렇다. “파리지점장으로 일하면서 얼마나 섭외를 게을리 했으면 와인 잔을 구분하지 못하겠는가.”

유럽의 고급 정찬식당에서는 물, 레드와인, 화이트와인, 샴페인에 따라 잔이 따로 나오며 잔 모양도 다르다.

#사례2=10년 전 사업차 이탈리아를 방문한 P씨(42)는 현지인이 주최하는 부부동반 모임에 초대받았다. 날씨가 덥다는 이유로 스테이크 옆에 준비된 레드와인을 마시지 않고 시원한 화이트와인을 요구한 P씨는 맥주 마시듯 와인을 소리 내며 벌컥벌컥 마셨다. 외국인과 접할 기회가 많았던 비즈니스맨 P씨는 이후 와인 매너를 몸에 익힐 때까지 협상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사례3=증권사 임원인 K씨(36)는 6년 전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한 고객의 집에 초대받았다. ‘이익을 보게 해줘 고맙다’는 것. 상당한 재력가였던 고객은 최고급 와인 ‘샤토 라투르’를 내놓았고 이를 소주 들이켜듯 한꺼번에 마시는 K씨에게 말했다.

“와인의 매너는 곧 그 사람의 인격과도 같아요. 손님을 만나려면 와인 매너는 꼭 익혀두세요.”

짤막한 충고였지만 분위기는 싸늘했고 거래는 시들시들하다 끊겼다.

▽와인과 비즈니스=“와인을 알면 국제 비즈니스가 부드러워진다.”

“국제화시대에는 영어뿐 아니라 와인도 비즈니스맨의 공통어.”

와인에 익숙지 않은 일반인에게 이런 말은 듣기 어색하다. 하지만 서양, 특히 유럽의 비즈니스맨들은 식사 도중 으레 와인을 곁들인다. 와인을 계기로 화제를 풀어나가곤 한다. ‘사례1’과 같은 일이 생기는 까닭이다.

또 ‘사례2’처럼 별것 아닌 일을 서양인들은 ‘제멋대로 주법’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다. 와인을 생활의 일부처럼 여기기 때문이다.

물론 활기찬 토론가라면 상대방의 문화제국주의적 태도를 날카롭게 지적할 수 있겠지만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그래봐야 뭐하랴. 와인 매너를 모르는 경우에도 의연하게 처신하되 여건이 된다면 익혀두는 편이 유리하다.

▽와인 배우기 열풍=세계화 바람과 함께 와인을 배우려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와인나라에서 운영하는 ‘더 와인아카데미’는 올해 들어 와인 특강을 해달라는 기업체 등의 요청이 지난해에 비해 3배 이상 늘었다. 보르도 와인아카데미는 주 타깃 고객층이었던 기업체 CEO 외에도 교수 의사 변호사 등이 많이 찾아오면서 ‘CEO 코스’라는 강좌명을 ‘리더스 코스’로 바꿨다. 이 회사 채인경 교육과장은 “일부 대기업들은 해외로 나가는 직원들에게 기본적으로 와인 특강을 실시하고 있으며 사적 모임에서도 특강을 요청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세계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와인을 강의하는 조선호텔 김희균 소믈리에는 “오후 7시부터 시작하는 강좌에는 수강생의 70%가 직장인들”이라고 전했다.

와인 가르치기가 하나의 산업으로 정착하고 있는 것. 여기에다 올해 한국의 와인 수입액은 작년보다 40%가량 증가할 전망이다. 이쯤 되면 한국에서도 와인은 ‘비즈니스를 위한 촉매제’일 뿐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비즈니스다.

▽상대에 대한 배려=전문가들은 “와인 매너의 핵심은 상대에 대한 배려”라고 강조한다. 조선호텔 김희균 소믈리에는 “비즈니스 파트너를 만났을 때 어떤 와인을 좋아하는지 물어보며 의사를 존중하는 게 첫째고, 상대방이 와인을 잘 모른다면 주문한 음식과 잘 어울리는 와인을 자연스럽게 추천해줘야 한다”며 “만약 상대방이 이탈리아인이라면 이탈리아산 와인을 시켜 이탈리아의 문화와 사회 등을 대화 소재로 이끌어내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와인에 대한 해박한 지식보다는 친근한 분위기와 넉넉한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

이렇게 보면 ‘사례3’에서 K씨의 고객은 그리 훌륭한 와인 애호가가 아닌 셈이다.

성동기기자 esprit@donga.com

▼와인 에티켓 ▼

1.손님에게 와인을 주문하는 권리를 준다

2.필요할 경우 상대방이 고른 음식에 맞는 와인을 골라준다

3.여성에게 먼저 따르고 손님에게 따른다

4.와인 잔의 절반 이하로 따른다.

5.잔에 와인을 따를 때 잔을 들지 않고 테이블에 그대로 둔다

6.마시기 위해 잔을 잡을 때 몸체가 아니라 다리 부분을 가볍게 잡는다

7.조금씩 음미하면서 마신다

(도움말 김희균 조선호텔 소믈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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