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경제 집중기획]<1>투자의 룰이 바뀐다

  • 입력 2003년 12월 31일 16시 27분


《동아일보는 2004년 경제 부문 어젠다로 ‘건강한 투자, 경제의 미래’를 설정했다. 미래를 기약하기 어려울 정도로 투자가 말라붙었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가 맞은 가장 큰 도전이다. 어떻게 하면 투자의 싹을 다시 틔우고 선진국으로 가는 문을 열 수 있을까. 10회의 기획을 통해 고민을 나눠본다.》

왼쪽의 그래프를 보시라. 현재 세계에서 가장 잘 팔린다는 경제교과서 ‘맨큐의 경제학’의 ‘생산과 성장’편에 나오는 것이다. 1960년 이후 30년간 한국은 가장 건실하게 성장한 나라로 그려졌다. 해당 대목을 인용해 보자. ‘투자가 경제성장에 얼마나 중요한지는 이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런데 남의 나라 교과서에까지 인용되던 ‘한국의 투자’에 요즘 탈이 났다.

▽투자가 안 된다=―3.4%, ―3.7%, ―7.0%.

이 세 개의 수치는 2003년 1·4∼3·4분기의 전년 동기 대비 설비투자증감률이다. 4·4분기엔 마이너스 얼마로 나올지 두렵다. 1996년 44조원에 이르던 설비투자가 2000년 이후 20조원대에 머물러 있다.

최근 공장기공식 삽질 장면을 보도한 기사를 본 적 있는가. LG필립스의 PDP공장처럼 투자계획을 발표하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온다. 워낙 투자가 안 되기 때문이다.

돈이 없나? 돈은 쌓여 있다. 부동(浮動)자금만 400조원이 넘는다. ‘투자의 비용’이라는 금리가 높은가? 초(超)저금리다.

전경련의 고위 인사는 말했다.

“예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은 총수를 불러 ‘외빈을 재울만한 호텔이 없으니 호텔을 지어달라’고 부탁했고 곧 호텔 투자는 이뤄졌다. 이렇듯 대통령이 기업총수를 만나서 투자를 촉구하고 약속 받아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투자를 일으킨 때가 있다. 대통령이나 장관이 투자를 이끌고 공무원들이 공장 건설을 재촉하던 시절이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모든 투자는 선(善)인가?’

▽투자의 양과 질=만성적 수요초과 상태에서는 투자의 양이 크면 클수록 좋았다. 한국이 60년대 이후 고도성장해 온 것도 집중투하 방식. 관(官)이 강권한 투자의 경우 나중에 잘못되면 관이 판로(販路)를 열고 금융지원을 하는 등 뒷감당을 했다. 그러나 외환위기를 계기로 ‘무모한 투자는 기업은 물론 나라경제를 거덜 낸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한보 한양 기아 대우가 그랬다.

최근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카드사태다. 무절제한 신용공여는 내수를 띄우고 수익도 가져와 잠깐 달콤했지만 결국 나라경제를 뒤흔들어 놓았다.

이런 시절은 지났다. 공급이 넘치고 있다. 정교하게 계산된, 건전한 투자가 필요한 것이다. “투자가 안 되는 진짜 이유는 돈 벌 만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투자는 계산이다.”(K그룹 기획담당 김모 임원)

이 얘기가 사실이라면 우리 경제는 적어도 하나의 측면에서는 건강해졌다. 과거식 ‘묻지마 투자’가 퇴조했다는 점이다. ‘투자의 룰’이 바뀐 것이다.

▽‘계산된 투자’는 잘 되고 있나=경제가 제대로 되려면 정교하게 계산된 투자가 튼튼히 뿌리내려야 한다. 그러나 이런 투자도 아직 보이지 않고 있다. ‘묻지마 투자’도, 계산된 투자도 모두 없으니 경제가 메마르고 있는 것.

왜 그럴까. “기업에 문제가 있다. 더 이상 집중투하 방식이 통할만한 ‘황금밭’은 없다. 그러나 많은 기업은 과거에 연연한다. 시장점유율과 설비증설에 집착하면서 ‘확실한 투자수익률을 보여달라’고 요구한다. ‘투자는 공장 짓는 것’이라 생각할 뿐 ‘산출의 효율을 높이는 투자’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연구개발(R&D) 투자의 비용과 효과에 대해 제대로 분석하고 있는가.” (최정규 맥킨지코리아 디렉터) 한국 기업은 생산공정의 효율화에 일가견이 있다.

그러나 중국의 출현 이후 생산비절감 방식은 우리의 승부수가 될 수 없다. 우리 기업이 익숙해 있는 과거공식, 즉 싼 생산요소의 대량투입 방식이 통하는 곳은 중국이다. 기업이 중국으로 몰려가 노동집약적 중진국형 산업, 중저 부가가치 산업을 계속하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새로운 투자처를 찾아서=작년 말 나온 한국은행의 보고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성장전략이 한계에 부닥쳤다. 기술모방과 규모확대 투자 전략으로는 선진국 진입이 불가능하다. 기술과 경영의 혁신에 자원을 투입하는 혁신주도형 전략으로 전환하면 성장경로가 바뀌며 선진국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성장동력을 재발굴해야 한다는 뜻. 정부도 이를 염두에 둔 듯 작년 8월 ‘10대 성장동력’을 발표했다. 디지털TV 디스플레이 미래형자동차 차세대반도체 바이오신약 등이다.여기에다 금융 유통 물류 정보 교육 환경 콘텐츠 등 비즈니스 서비스의 고효율화가 열쇠다.

‘90년대 중반 이후 미국이 고성장은 IT산업과의 결합을 통해 서비스산업 생산성이 높아졌기 때문’ (하버드비즈니스리뷰·2003.10)이다.신산업-서비스-전통제조업의 동반성장이 필요한 것.산업정책연구원(원장 조동성·서울대 경영학과 교수)은 2003년 한국의 국가경쟁력은 25위라며 이같이 밝혔다. “한국이 저원가 전략을 계속 추진한다면 43위로 추락할 수도 있다. 반면 미래성장산업의 제품과 서비스를 차별화하는 쪽으로 전략을 바꾼다면 5위로 도약할 수 있다.”위기는 위험하다. 그러나 위기를 인식하는 순간 그것은 기회가 될 수 있다.


허승호기자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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