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2003년에 수출호조에도 불구하고 실질 경제성장률이 3%를 밑돈 것으로 추정된다. 저성장의 원인과 극복방안은….
“한국의 경기침체는 (국내소비 침체 등) 순수 경제적 요인 이외에도 리더십 부재(不在)와 기업-정부 관계 변화와 같은 다른 정치경제적 요인도 작용했다. 또 자본축적과 선진기술 모방에 의한 경제성장이 끝나면서, 더 이상 과거의 고성장을 지속할 수 없는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한국이 추구해야 할 새로운 모델은 혁신, 생산성 증가, 그리고 내수시장 확대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리더십 부재란 무엇이고 이것이 어떻게 경제성장에 영향을 미치는가.
“정치적 리더십이 약하고 정당과 시민사회간 갈등이 심화되면 정책의 일관성과 경제에 대한 확신이 흔들린다. 2001∼2002년 아르헨티나 정치와 경제의 몰락은 좋은 예라 할 것이다. 연립정권 내부의 갈등, 정책 실패, 이해집단 반발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국가 부도사태가 초래됐다.”
한국의 경우를 설명해 달라.
“1997년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대통령의 힘이 약화되어 위기에 대한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현재 한국이 그렇듯이 대통령이 속하지 않은 야당이 의회를 지배할 가능성은 어떤 대통령제 국가에서도 있다. 그렇지만 모든 곳에서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는다. 많은 경우 각 정당이 지도력을 갖추고 그들이 동의할 수 있는 분야에서 정책적 협력을 하는 형태로 문제를 해결한다. 현재 한국에선 그런 리더십을 찾아 볼 수 없다. 또 지난 몇 달간 정치적 정책적 주도권을 잡으려는 대통령과 지지자들의 노력이 불확실성을 야기했다.”
대통령과 지지자들의 주도권 노력이란….
“대통령 소속 정당의 분당 사태, 신임투표 제안, 불법 선거자금에 대한 강력한 조사의지 등이 그것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불법 선거자금에 대한 조사는 한국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건강한 민주주의를 위해 대단히 중요하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한국에서 이 조사는 재벌들을 코너로 몰고 있다.”
기업-정부관계는 어떻게 맺어져야 하는가.
“과거 친밀했던 기업-정부 관계는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성장 초기 단계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이 문제점을 일으켰다. 한국의 경우 고도의 기업집중 현상을 야기하고 금융부실을 수반했으며 결국 97년 금융위기를 초래하는 데 일조했다. 새로운 기업-정부 관계는 건강한 시장경제체제 아래에서 민간부문과 정부가 적당한 긴장을 형성하는 형태가 바람직하다.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강조하고 싶다. 우선 민간부문은 경제의 성장과 혁신의 기반이다. 때문에 민간부문의 활동은 기업 친화적 환경을 통해 격려돼야 한다. 반면, 정부는 기업과는 다른 형태의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은 국방 경찰 공원 도로 같은 공공재, 사회정책, 환경보호와 같은 것들인데, 이런 정책을 추구함에 있어서 정부-민간부문간 긴장이 형성될 수 있다.”
기업 친화적이면서도 동시에 긴장관계를 유지하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많은 사람들은 활력 있는 시장경제를 위해 국가가 일정한 규제를 하고 공공재를 공급하면서 이를 위해 세금을 걷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해한다. 일정한 수준의 사회 안전망을 구축함으로써 시장경제의 기능을 강화시키는 데 기여하고 사회적 형평을 추구할 수 있다. 사회안전망을 확보할 때 사회적 갈등의 분출도 훨씬 완화될 수 있다.
시장경제란 민간기업들이 선호하는 것과 시장경제를 효과적으로 가동시키기 위해 필요한 광범위한 정치적 어젠다 사이에 균형을 맞추는 일이다. 시장의 힘과 당국의 규제는 상호 대립되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금융시장처럼 복잡한 시장에서 시장의 효율적 기능을 위해 규제는 필연적이다.”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노사관계가 격화돼 왔다. 정치적 민주화는 노사관계 불안을 유발할 수밖에 없나.
“권위주의 정치체제를 겪는 동안 노동자와 경영진 사이에 불신이 형성됐다. 일부 기업에서 권위주의적 경영관행이 계속되고 있는 게 사실이고 일부 노조에 대한 신뢰감이 없다는 게 문제를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유럽에서 나타나는 조합주의가 한국에서 정착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하지만 노동자와 경영진이 기술 숙련도를 높이기 위해 협력할 여지가 있다. 중국이나 다른 저임금 국가들이 세계시장에 진입함에 따라 한국 기업들이 더욱 기술집약적 상품을 생산해야만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기술 숙련도를 높이기 위해 노동자들이 일정수준 경영에 참가해야 한다는 말인가.
“교육이란 정부, 기업, 노동자 3자 모두가 참여해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분야다. 정부가 높은 품질의 기초 교육을 제공한다고 역할이 끝나는 게 아니다. 대학을 지원해 기술혁신의 허브가 되도록 해야 한다. 미국의 실리콘밸리, 보스턴, 샌디에이고 등에 형성된 고도의 기술혁신 클러스터를 참고해야 한다. 이들 클러스터의 핵심에는 스탠퍼드대, 매사추세츠공대(MIT), UC 샌디에이고 등 세계적 연구역량을 갖춘 대학들이 존재한다.
한국기업 중 일부는 내부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노동자들도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정부와 노사가 머리를 맞대는 것이 중요하다. 지식기반 경제체제에서 기존 지식의 가치는 급속히 쇠퇴한다.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인적자원을 개발하기 위해 인센티브가 주어지는 게 좋다. 가령 특정한 교육비용은 면세되어야 할 것이다.”
현재 한국에선 기업지배구조와 관련해 날카로운 의견 대립이 존재한다. 일부에선 소액 주주의 권한을 강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다른 쪽에선 주주 권한만 강조함으로써 단기적 주가상승에 대한 시각만 강화되고 장기적 투자가 저하된다고 말한다.
“기업지배구조는 투자자의 확신을 확보하기 위해 중요하다. 엔론 사태가 보여주듯이 한국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문제다. 기업지배구조는 궁극적으로 기업 실적에 영향을 미친다.
한국의 가족 소유 기업들은 오랫동안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일부 기업들은 기업 지도자들의 야망이 기업 이사회, 주주, 그리고 금융시장에서 완전하게 점검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었다. 좋은 기업지배구조를 위해 어떤 특정한 모델을 외국으로부터 수입해야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맞춰 현재 존재하고 있는 문제점을 고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한국의 경우 정부-은행-기업이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오면서 기업 경영에 대한 외부의 규율이 행사되지 않았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그렇다면 기업의 투자행위에 규율을 가할 수 있도록 금융시장과 은행의 역량을 강화하는 방향의 지배구조가 필요하다.”
대담:김용기기자 국제정치경제학박사 ykim@donga.com
▼스테펀 해거드는 ▼
스테펀 해거드 교수는 해외 학자 가운데 한국경제의 성장 분야에 가장 정통하다는 평을 듣는다. 그가 1990년 출간한 저서 ‘주변부로부터의 오솔길: 신흥공업국의 정치경제학’은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와 남미 국가들의 경제발전 경험을 비교분석한 것으로 개발경제학 분야 저술 중 ‘백미(白眉)’로 꼽힌다.
해거드 교수는 동아시아 성장의 비결을 ‘개발국가(Developmental State)’의 존재에서 찾았다. 개발 국가란 정부 관료가 민간부문의 이해(利害)에 좌우되지 않는 자율성을 가지고 경제성장 등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는 한편, 기업과 정부가 친밀한 관계를 통해 정보를 공유하고 최적의 정책을 추구해가는 국가를 말한다.
그를 비롯한 몇몇 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한국 경제발전 경험은 90년대 이후 경제학, 정치학, 국제관계학 분야 등 세계 학계 뿐 아니라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의 주요 관심사로 떠올랐다.
한국의 외환위기 때는 미국 의회 청문회 증언을 통해 한국 등에 대한 신속한 지원의 필요성도 역설했다. 한국에 대한 이 같은 ‘애정’은 72년에서 74년까지 주한미군으로 근무한 경력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 다른 저서 ‘실리콘밸리에서 싱가포르까지: 하드디스크 드라이브 산업의 지역선택과 경쟁이익’(2000년)은 미국 첨단기업들이 핵심적 연구와 생산품 개발은 철저히 미국, 특히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하면서 조립생산 공장은 동남아시아, 특히 싱가포르에 두는 이중적 지역선택전략을 분석한 연구다. 이 책은 글로벌 시대 첨단산업의 경쟁력 유지를 위해 기업과 국가가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분석했다는 점에서 한국경제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졌다.김용기기자 ykim@donga.com
▼스태펀 해거드 교수 주요 약력 ▼
·미국 출생
·1983년 미 캘리포니아대 버클리(UC 버클리) 박사
·1983∼91년 미 하버드대 행정학과, 국제관계센터 교수
·미 외교협회, 세계은행, 국제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역임
·2000∼2001년 UC 샌디에이고 국제대학원장
·1992∼현재 UC 샌디에이고 국제대학원 교수
·주요 저서
-‘주변부로부터의 오솔길: 신흥공업국의 정치경제학’(1990)
-‘실리콘밸리에서 싱가포르까지: 하드디스크 드라이브 산업의
지역선택과 경쟁이익’(2000)
-‘아시아 금융위기의 정치경제학’(2000)
-‘경제위기와 한국의 기업구조조정’(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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