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전망대]허승호/‘구성의 오류’

  • 입력 2004년 1월 4일 17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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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에서 앞 사람의 큰 덩치 때문에 화면이 잘 안 보이는 경우가 있다. 일어서면 잘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관객이 서서 보면 어떨까. 모두 다리만 아프다.

이를 ‘구성의 오류(fallacy of com-position)’라 한다. 개별적으로는 합리적인 선택일지라도 전체가 함께 하면 엉뚱한 결과가 나타난다는 뜻.

이런 현상은 경제 분야에서도 간혹 발견된다. 나 한 사람이 절약하고 부지런히 저축하면 부자가 된다. 그러나 전 국민이 절약하면 수요위축으로 불황에 빠진다. ‘절약의 역설’이다. 또 있다. 풍작은 좋은 일이지만 전국에서 마늘농사가 지나치게 풍년이 들면 마늘농가는 밭을 갈아엎는다. 농산물 파동이다.

투자부진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기업이 투자를 망설이는 것은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 국내에 투자하기보다 품삯과 땅값이 싼 중국으로 가는 것도 생존을 위한 발버둥이다.

그러나 국가경제 전체로 보면 경제위축과 산업공동화라는 엉뚱한 결과가 나타난다. 일종의 구성의 오류다.

그러나 투자 기피는 ‘극장 관객’이나 ‘절약의 역설’ 등의 사례와 아주 다른 측면이 있다. 극장에서 구성의 오류를 피하려면 다함께 앉아서 보면 된다. 절약으로 인한 불황을 이겨내려면 적절한 소비유인책을 쓰면 된다.

그렇다면 기대수익이나 위험 등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는데 일단 투자부터 감행한다고 구성의 오류가 극복될까. 수지타산이 안 맞는데도 중국 진출을 포기하고 모든 제조업체가 국내에 떡 버티고 있으면 경제가 정상화될까. 그렇지 않으니까 일이 꼬인다.

특히 투자는 기업의 생사와 관련된 사안이다. 투자판단은 기업이 가장 잘 안다. 제3자가 나서서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 없다. 특히 ‘묻지마 투자’의 참담한 결과는 외환위기를 통해 충분히 겪었다.

동아일보가 새해의 경제어젠다로 ‘건강한 투자, 경제의 미래’를 설정한 것도 이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투자가 제일이다’ ‘투자부터 해야 한다’는 과거식 접근은 더 이상 먹혀들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건강한 투자, 미래를 약속할 수 있는 투자, 선진국으로의 길을 여는 투자는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투자를 되살릴 수 있을까.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는 자본, 노동 등 생산요소를 대량 투입하여 고도성장해왔지만 추가 투입할 생산요소가 슬슬 고갈되어 가고 있다. 고도성장은 조만간 한계에 이른다. 요소 ‘투입량’ 증가가 아니라 요소 ‘생산성’ 증가가 이뤄져야 한다.”(폴 크루그먼 미국 MIT대 교수·‘아시아 기적의 신화:우화적 경고’·1994년 12월)

눈 밝은 이 경제학자는 한국의 문제를 우리보다 먼저 본 모양이다.

성장동력 회복과 한국경제의 미래에 관한 ‘묵직한 고민’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한다.

허승호기자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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