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 부재-선심정책이 한국경제 망친다”

  • 입력 2004년 2월 1일 19시 04분


《지난달 19일 발표된 경제·경영·행정학 교수 411명의 ‘경제 시국선언’은 우리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왔다. 한국경제의 위기를 경고하고 대통령과 정부의 경제 리더십 회복을 촉구한 호소에 대한 공감대도 컸다. 10여일 동안 추가로 서명한 교수가 이미 200명을 넘어섰다. 본보 경제부는 이번 시국선언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교수 3명을 초청, 한국 경제의 현주소와 대안을 들어보는 긴급좌담회를 가졌다. 지난달 30일 동아일보사 19층 회의실에서 열린 좌담회에는 김병주(金秉柱)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와 이천표(李天杓)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선우석호(鮮于奭晧) 홍익대 경영학부 교수가 참석했다. 사회는 권순활(權純活) 본보 경제부 차장이 맡았다. 》

▽사회=많은 대학교수들이 경제문제로 ‘시국선언’을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인 것 같습니다. 먼저 한국 경제의 ‘현주소’를 진단해 주십시오.

▽선우석호 교수=한국경제의 문제가 지난 1년 사이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새 대통령 취임 이후 더 방향타를 잃고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졌습니다. 지금 새로운 방향으로 의지를 모으지 않는다면 남미처럼 추락하거나 ‘동북아의 미아(迷兒)’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이천표 교수=2003년의 경제성장률은 예상보다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정부, 가계를 포함해 국내 부채는 사상 최대 수준입니다. 잠재성장률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고 있으며 잠재성장률 자체도 더 낮아질 수도 있는 어려운 시대입니다.

▽김병주 교수=성장잠재력을 키워 ‘성장 모범국’자리를 지켜야할 시점에서 한국경제는 ‘미끄럼’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부터 4년을 이대로 보내면 회복하기 힘들 것입니다.

▽사회=경제가 위기를 맞고 있다는 데 의견이 일치하는 것 같습니다.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이며 이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김 교수=한국의 ‘내셔널 아이덴티티(국가 정체성)’는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입니다. 그런데 최근 이에 대해 회의를 가진 세력이 득세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또 이를 지켜나가기 위한 리더십의 부재(不在)도 두드러집니다. 무엇보다 내셔널 아이덴티티를 확립해야 합니다.

▽이 교수=원칙이 흔들리다보니 일관성이 결여되고 불확실성이 커졌습니다. 원칙을 확실히 하고 일관성 있게 집행해야 합니다.

▽선우 교수=현 정부 출범 후 정책방향과 사용하는 정책의 불일치가 심화됐습니다. ‘2만 달러 시대 달성’을 내걸고도 “경제가 잘못돼도 북한문제만 해결되면 된다”고 대통령이 얘기하고 주무장관이 “법을 안 지켜도 노조활동을 묵인하겠다”고 말합니다.

▽사회=이번 시국선언에서는 정부의 ‘인기 영합주의’와 ‘아마추어적 열정’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했습니다. 어떤 부분을 지적할 수 있을까요.

▽선우 교수=노 대통령 취임 후 나온 “7%성장을 하면서 분배도 하겠다”는 말은 조금만 경제를 아는 사람이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쪽을 위해서는 다른 한쪽을 약간은 희생해야 합니다. 이것은 대표적 인기 영합주의이며 작동할 수 없는 정책입니다.

▽이 교수=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처리과정을 들어볼까요. 정부가 한해 정부예산에 맞먹는 119조원을 10년간 농촌에 지원하겠다고 밝혔는데도 반발이 컸던 것은 ‘커뮤니케이션’의 실패 때문입니다. 농민들을 설득하고 믿음을 얻어내는 과정이 부족했으며 이를 주도하는 리더십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김 교수=대기업을 무조건 두둔할 순 없지만 시장경제의 요체는 경쟁이며 ‘경쟁의 승자’인 기업의 발목을 잡는 것은 문제입니다. 정부가 ‘대기업 때려잡기’ 인상을 줘서는 안 됩니다.

▽사회=총선을 앞두고 각 정부부처에서 ‘선심성 정책’ 의혹을 받을 수 있는 정책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이 교수=경제가 어려울 때에 적자재정 정책을 쓰거나 세금감면을 하는 것은 원칙적으로는 맞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지출이 필요한 정책을 썼을 때 나타날 비용과 편익 분석을 제대로 해 대비책을 마련했느냐가 문제입니다.

▽김 교수=과거에는 선심성 정책이라면 골목에 ‘보도블록’을 깔아주는 정도였습니다. 요즘은 선심성 정책의 규모가 엄청나게 커졌습니다. 노 대통령의 공약인 ‘행정수도 이전’에 필요한 예산은 당초 4조원보다 훨씬 늘어날 것 같습니다. ‘제한된 자원’을 분별 있게 쓰기 위한 고려를 해야 합니다.

▽사회=성명에서 “제자들이 취직 못하는 현실을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밝힌 부분은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한 진정한 방법은 무엇일까요.

▽선우 교수=‘저성장’의 틀에서 벗어나려면 정부가 기업의 ‘투자 마인드’를 살리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강한 노조가 젊은이의 일자리 창출을 막는 것도 경계해야 합니다. 또 이공계 투자 등 교육기관에 대한 적극적 투자를 늘려야 합니다.

▽이 교수=국제 자본이동에서는 원래 ‘홈 바이어스’라는 것이 작용합니다. 투자자들이 가능하면 자신들이 잘 알고 있고 인연이 있는 자국에 투자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 원칙이 깨어지고 있습니다. 한국 기업도 바깥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외국기업인들 들어오겠습니까. 기업에 안정된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합니다. 노동계 지도자들은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연봉 5000만원 이상을 받는 분들이 빨간 띠 두르고 시위할 때 피해보는 것은 노동시장에 진입조차 하지 못한 젊은이들입니다.

▽김 교수=“기업들이 왜 불안해하는지 모르겠다”는 대통령의 얘기가 역설적으로 기업인들을 불안하게 합니다. 대통령이 기업가의 마인드를 읽지 못하거나 읽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 기업들은 ‘홈 바이어스’가 아닌 ‘포린 바이어스(해외로 나가려는 경향)’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지난 1년간 정부가 보여준 리더십에 대한 평가와 대안은 무엇일까요.

▽김 교수=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 제도를 부활하든지 경제부총리에게 대통령이 힘을 실어줘야 합니다. 둘 다 없는 상태에서 대통령과 주변의 측근 보좌관들이 경제정책을 주도하는 것이 리더십 부재의 원인이며 이를 바로잡는 것이 대안입니다.

▽이 교수=정책의 일관성이 결여되니까 불확실성이 생깁니다. 최고 지도자는 결정만 해야지 사소한 결정에 간여해선 안 되고 왜 결정했는지 일일이 설명하려 하면 안 됩니다.

▽선우 교수=정책마다 대통령의 입만 바라보고 어디가 주무부처인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명백히 천명하고 경제문제는 전문가들에게 최대한 맡겨야 합니다.

▽김 교수=김영삼, 김대중 정부의 가장 큰 실책은 우리 국민들에게 ‘군사 권위주의’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이 과거 비(非)민주적 분위기를 잊었다는 점도 있지만 최소한 경제정책은 군사정권 시절에 더 일관됐다는 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회=지난 1년간 ‘성장과 분배’ ‘효율과 형평’을 놓고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현 상황에서 볼 때 어느 쪽에 비중을 두는 것이 옳다고 보시는지.

▽김 교수=분배를 위해서도 성장이 가장 좋은 처방입니다. 여러 가설이 있지만 성장을 해야만 분배가 이뤄진다는 데 이론은 없다고 봅니다(다른 교수도 모두 동의).

▽사회=기업에 대한 검찰의 대선자금 수사와 관련해 경제적 측면에서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요.

▽이 교수=예방조치를 빨리하고 수사를 빨리 끝낸 뒤 국민의 합의를 거쳐 기업인들에게 ‘면죄부’를 줄 수 있는 조치를 해야 합니다.

▽선우 교수=빠른 시일 안에 기업들이 스스로 ‘고백성사’를 하도록 하고 기업 활동이 가능한 여건을 조성해야 합니다. 파급효과가 정치적으로 악용되는 것도 경계해야 합니다.

▽김 교수=검찰수사는 필요하지만 엄정해야 합니다. 소환된 대기업 임원들이 여권에 준 돈은 ‘불면’ 안 되고, 야권은 최대한 불어 (노 대통령이 말했던) ‘10 대 1’의 비율에 맞춰야 한다면 곤란합니다.

▽사회=성명을 발표한 뒤 교수사회나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는지요.

▽김 교수=선언을 발표한 뒤 제일 먼저 집사람에게 ‘야단’맞았습니다.(웃음) “평생 그런 일하고 관계없이 살더니 왜 그랬느냐”는 것이죠. 하지만 주변 교수들로부터 “왜 자신은 뺐느냐”며 연락이 많이 오더군요. “이제는 경제를 챙겨 달라”는 이번 선언이 정말 선언에서 그쳤으면 좋겠습니다.

▽이 교수=많은 다른 학과 교수님들이 “잘 했다” “꼭 필요한 일을 했다”고 격려해 주더군요.

▽선우 교수=전혀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교수님들이 훌륭한 일을 하셨다” “앞으로도 연구실에만 틀어박혀 있지 말고 의사를 표현해 달라”는 e메일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번 선언은 “앞으로 4년을 이대로 보내선 안 된다”는 학자들의 외침이며 그렇게 이해됐으면 합니다.

▽사회=마지막으로 한국경제가 ‘1만달러의 덫’을 벗어나 도약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말씀해 주십시오.

▽선우 교수=세계를 향해 뻗어 나가야 할 지금 국가 경영자들은 국내의 갈등조차 조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개인적 관계로 맺어진 ‘이너 서클’이 ‘코드 정치’로 조화를 깨뜨리고 있습니다. 세계를 내다보며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통합의 리더십이 발휘돼야 합니다.

▽이 교수=창의적이고 탁월한 천재들을 키워내기 위해서는 교육문제를 시장과 자율에 맡겨야 합니다. ‘평준화’ 같은 일률적 도그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김 교수=카를 마르크스는 ‘경제’를 하부구조로 가장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경제를 가장 중시해야 할 공산주의가 국가, 사회적 비효율을 방치하고 경제를 무시해 망했다는 것은 아이러니이자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경제는 사회를 지탱하는 기초입니다. 국회 의석 몇 개를 더 얻기 위해 경제를 흔들면 현 정부 5년은 실패로 기록될 것입니다. 대통령이 특유의 ‘순발력’을 발휘해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줬으면 합니다.

▽사회=한국경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말씀들이 우리 사회에 많은 시사점을 주는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정리=박중현기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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