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일방주의식(式) 보호무역의 강화,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한 세계경제의 지역 블록화, 인도 중국 등 일부 개발도상국의 급부상으로 통상 여건이 악화되는 조짐이다.
여기에다 국내에서는 정치권과 일부 단체의 ‘현실 왜곡’이 한-칠레 FTA 비준을 지연시키고 있다. 쌀 시장 개방 재협상을 놓고도 비현실적인 주장이 커지면서 정부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특히 9일로 예정된 국회의 한-칠레 FTA 비준이 중대고비다. 만약 이번에도 정치논리에 밀려 무산되면 한국은 국제무대에서 신뢰를 잃어 무역경쟁력에 치명적 타격을 받을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통상 현안, 왜곡과 회피=쌀시장 개방과 관련해 정부의 한 고위 당국자는 최근 “이대로 가면 우리는 전사(戰死)하든지 바보가 되든지 둘 중 하나”라고 말했다.
국제 현실에 맞게 협상을 추진하다가는 농민과 정치권의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되고, 개방을 유예할 수 있다는 비현실적인 주장을 하다간 국제무대에서 ‘바보’가 될 것이란 설명이다.
1994년 출범한 우루과이라운드(UR)협정에 따르면 쌀 시장은 개방이 원칙이다. 한국은 당시 예외적으로 10년간의 개방 유예를 받았다.
올해 쌀 시장 개방 재협상에서도 개방이라는 원칙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법무법인 광장의 정영진 통상전문 변호사는 “UR협정에 따르면 한국이 추가로 쌀 시장 개방을 유예하려면 모든 교역 상대국이 납득할 수 있는 추가적(additional and acceptable) 조치를 취하도록 돼 있다”고 말했다.
농림부 당국자는 “농산물 이외의 분야에서 한국이 상대국에 보상을 하지 말라는 내용은 없다”며 쌀 시장 개방의 추가 유예에 따른 피해를 우려했다.
한-칠레 FTA에 대해서도 사실과 다르게 알려진 점이 적지 않다.
칠레와 FTA를 체결한 유럽연합(EU)에 비해 한국이 칠레로부터 개방의 예외 품목을 적게 얻었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이는 품목 수 분류방법이 EU와 한국이 달랐기 때문으로 개방예외 품목의 비율은 한국(28%)이 EU(22%)보다 높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지난달 8일 국회에서는 일부 국회의원들이 칠레가 세계 3위의 농산물 수출국이라는 잘못된 주장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칠레는 14위의 농산물 수출국이다.
외교통상부는 사과 배 성수기포도 등 칠레의 주력 수출품이 개방 품목에서 빠져 있어 한국 농업에 미치는 영향은 적다고 주장했다.
▽기회가 악재로 바뀔 수도=최낙균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무역투자정책실장은 “인도 러시아 중국 등 거대 개발도상국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8%선에 이른다”며 “한국이 FTA무대에서 소외되면 거대 시장을 놓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최근 미국의 올해 경제성장률을 4%대로 전망했다. 유럽과 일본 등도 경제 회복이 기대되고 있다.
무역의존도가 70%에 이르는 한국은 세계 경제의 회복이 좋은 기회가 된다.
그러나 FTA 체결을 통한 세계 경제의 지역 블록화에서 소외되면 오히려 수출시장을 잃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무역협회에 따르면 작년 한 해 동안 세계적으로 11건의 FTA가 체결됐고 올해 협상이 진행 중인 FTA는 33건에 이른다. 세계무역기구(WTO) 146개 회원국 중 지금까지 한 건도 FTA를 발효시키지 못한 국가는 한국과 몽골뿐이다.
미국의 경제 회복은 한국에 기회가 되지만 통상압력 강화는 한국의 위기로 볼 수 있다. 김병섭 외교통상부 다자통상과장은 “한미 투자협정(BIT) 체결로 무역장벽에 대응하고 한국의 대미(對美) 수출시장을 넓혀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 통상 조율 시스템 부재=박노형 고려대 법대(통상법) 교수는 “통상 협상에는 반드시 피해집단이 있을 수밖에 없다”며 “통상 정책의 조율 체계를 정비하고 부처간 이견을 조율할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 부처간 이기주의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통상 현안에 따라 산업자원부 해양수산부 농림부 문화부 등의 견해 차이가 꽤 두드러질 때도 적지 않고 이것이 전체 국익에는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일부 전문가들은 통상 현안과 관련, 타 부처와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기여한 공무원에게 인센티브를 줘야한다는 제안도 내놓는다. 또 대외개방홍보기획단을 만들어 체계적인 대국민 홍보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한편 외교통상부는 올해 통상 협상을 체결할 국가 선정부터는 공청회, 부처간 회의 등을 규정할 절차법 제정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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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우기자 lib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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