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관투자가 “경영실패 책임 못떠넘긴다”

  • 입력 2004년 2월 18일 19시 04분


“회사 분할 과정에서 대주주에게 자금을 몰아준 것 아닙니까?”

“내부자 정보를 이용한 부당거래 의혹은 어떻게 해명하실 겁니까?”

“대주주의 경영실패 책임을 회사에 떠넘기는 것 아닙니까?”

최근 한 상장사 대표 K씨는 투자자문사 대표 A씨의 질책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작년 한해 이사진들이 내린 경영상 판단에 대해 A씨가 조목조목 따져 물었던 것.

회사측은 이 기관투자가가 10여개 경영 관련 항목을 조목조목 짚어내며 소액주주를 대표해 소송제기나 독립감사 선임 가능성까지 들이대는 것에 대해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만족할 만한 답변이 없으면 주주총회에서 의결권을 적극 행사하겠다”는 게 A씨의 마지막 경고였다.

▽‘주주총회, 올해는 다르다’=기관투자가들이 달라지고 있다. 기업지배구조 개선 등 적극적인 경영간섭을 통해 기업가치를 높이는 데 앞장설 태세다. 이런 움직임은 올해 정기 주주총회에서 정점에 이를 전망이다.

동원투신 이창훈 상무는 “주주가치와 반(反)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의견을 내겠다”며 “주주가치를 따져 사안별로 의결권을 행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부터는 ‘간접투자자산 운용업법’에 따라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을 경우 그 사유까지 공시를 통해 밝혀야 한다. 주주중시 경영에 대한 인식 확산, 시민단체 및 소액주주 활동 등도 이런 분위기를 부추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외국인투자자들이 주총에 관심을 보이는 것도 주목되는 부분. 한 펀드매니저는 “대기업 주식을 보유한 미국계 펀드가 국내 기관의 주주권 행사에 관심을 표명했다”며 “의결권 행사 등을 통해 고배당이나 지배구조 변화를 요구하는 외국인이 더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막상 대표적인 ‘큰손’인 국민연금은 아직 의결권 행사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기금운용의 정책을 결정하는 운용위원회에서 의결권 행사 여부에 대한 논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실무부서가 적극 나서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털어놨다.

▽‘있을 때 잘할 걸…’=기관투자가들이 주주권 행사에 뒤늦게 나서고 있지만 지분 감소로 인해 주총에서의 영향력이 그다지 크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투자자들의 펀드 환매 요구가 계속되면서 투신사들의 보유 지분이 크게 줄어든 때문이다.

한국펀드평가에 따르면 주식형, 혼합평 펀드에 편입된 주식의 평가액은 최근 1년간 무려 10조원 가까이 빠져나갔다. 투자자 이탈과 주식투자 감소로 주총에서 행사할 수 있는 목소리도 줄어드는 셈이다.

한국투신운용 권성철 사장은 “주가상승기에 투자자들이 이탈한 것은 투신권과 기업 모두에 대한 불신 때문”이라며 “기관투자가의 의결권 행사는 투신권의 신뢰를 회복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삼성투신운용 이해균 주식운용본부장도 “불투명한 기업지배구조 등 디스카운트 요인이 해소되면 한국 증시의 수준은 더 높아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정은기자 lightee@donga.com

박용기자 par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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