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버린이 3월 주주총회에서 승리해 이사회를 장악할 경우 한국 굴지의 대기업이 외국인에 의해 적대적으로 인수되는 첫 사례가 된다. 기업이 아닌 펀드가 적대적 인수합병(M&A)을 통해 대기업을 삼키는 일은 1980년대 말 ‘기업 사냥꾼’이 득세했던 미국을 제외하고는 사례를 찾기 힘들다.
SK㈜가 SK그룹의 사실상 지주회사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 의미는 훨씬 커진다. 소버린은 주총에서 승리할 경우 우선 최태원 회장이 SK㈜ 회장직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회사가 부도나지 않았는데도 재벌 오너가 경영권을 내놔야 하는 상황에 처하는 것.
또 SK㈜가 보유 중인 SK텔레콤 등 계열사 지분을 제3자에게 매각할 경우 SK그룹은 현재의 모습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자산 50조원과 계열사 59개를 거느린 재계 3위(자산 기준)의 SK그룹이 1768억원을 투자한 외국인 펀드에 의해 해체될 수도 있는 위험에 처한 것.
M&A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는 SK측이 빌미를 제공한 측면이 크다”고 지적했다.
한편 소버린측 국내 홍보대행사는 “소버린은 주주권리를 이용해 이사후보를 추천했을 뿐이며 경영권 장악목적은 없다. 과거에도 적대적 M&A를 추진한 사례가 없다”고 말했다.
▽첫걸음은 이사회 장악부터=SK㈜ 주주들은 이번 주총에서 총 10명의 이사 가운데 6명을 새로 뽑는다. 손길승 그룹 회장, 황두열 SK㈜ 부회장, 김창근 SK㈜ 사장, 사외이사 3명 등 모두 6명의 이사 임기가 만료되기 때문이다. 최 회장의 임기는 내년 초에 만료된다.
SK측은 이사후보 6명의 명단을 22일 발표할 예정이다. 소버린은 이미 서울대 조동성 교수 등 5명을 이사후보로 추천했다. 소버린이 표 대결에서 이기면 SK측 이사와 동수(5 대 5)를 이루기 때문에 소버린측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특히 소버린은 회사의 자금 흐름을 견제할 수 있는 감사위원 선임 대결에서 유리한 고지를 이미 차지했다. 상법은 대주주의 전횡을 견제하기 위해 ‘3% 초과 지분을 가진 주주라도 감사위원을 선임할 때는 3%만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 때문에 SK측은 손발이 묶인 상태. 그러나 소버린은 작년 말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지분을 3% 이하로 분산시켜 놓아 사실상 15%가량의 의결권을 모두 행사할 수 있다.
▽SK㈜의 경영진 교체 수순=소버린은 표 대결에서 승리하면 곧바로 경영진 교체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1월 초 모로코로 가서 소버린의 대주주인 챈들러 형제를 면담한 고려대 장하성 교수는 1월 20일 기자회견에서 “소버린측은 최 회장이 반드시 물러나야 한다는 방침을 굽히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소버린측 핵심 관계자도 “최 회장은 1심에서 SK네트웍스(옛 SK글로벌) 분식회계 사건과 관련해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경영능력을 검증받지 못했다”며 “국내외를 망라해 정유업의 전문가를 영입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최 회장의 퇴진 요구가 단순히 으름장이 아니고 반드시 관철시켜야 할 핵심 사항임을 분명히 한 것.
그러나 최 회장의 퇴진이 현실화될지는 불투명하다.
소버린은 한국의 정서를 감안해 자신들의 사람이라기보다는 최 회장의 뜻을 무조건 따르지 않고 독립적인 판단을 할 것으로 기대되는 한국인들을 이사후보로 추천했다.
하지만 이사후보들이 소버린의 주장을 무조건 따르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소버린이 추천한 이사후보 5명 모두 “특정 주주(소버린)의 이익보다는 SK㈜ 전체 주주의 이익을 위해 독립적인 의사결정을 하겠다”고 밝혔다.
소버린측은 SK㈜ 이사들이 다른 계열사나 최 회장의 개인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SK㈜의 이익만을 생각하며 ‘정유 및 화학사업을 잘 아는 전문가’라는 잣대만으로 경영자를 뽑는다면 새로운 경영자 영입을 수용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SK그룹의 운명은=SK㈜가 지주회사 역할을 할 수 없게 되면 최 회장의 진퇴와 상관없이 SK그룹은 전통적 의미의 재벌 시스템을 유지하기 어렵다. 단순한 순환출자 관계로 브랜드와 이미지만 공유하는 대기업 연합이 되는 것이다.
SK㈜의 철저한 독립경영은 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SK텔레콤에도 큰 영향을 준다. SK㈜는 SK텔레콤의 최대주주(21.5%).
소버린이 SK㈜ 지분을 14.99%만 매입한 것도 SK텔레콤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것이다. 전기통신사업법상 소버린의 SK㈜ 지분이 15%를 넘으면 SK㈜는 외국인 회사로 분류돼 SK텔레콤에 대한 의결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된다.
새로 구성되는 SK㈜의 이사진은 SK네트웍스에 대한 지원을 중단할 가능성도 있다. 이는 채권단이 SK㈜와 SK텔레콤의 전폭적인 지원을 전제로 마련한 SK네트웍스 회생안이 차질을 빚는 것을 의미한다.
소버린측은 한 발 더 나아가 SK㈜가 보유한 계열사 주식을 처분할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다.
한 외국계 투자은행가는 “새로운 SK㈜ 경영자가 동남아지역 정유사업에 진출하기 위해 투자비가 필요하다고 판단할 수 있고 이를 위해 SK텔레콤의 주식 전부나 일부를 팔 수 있다”고 밝혔다. SK㈜가 보유 중인 SK텔레콤의 지분은 3조6000억원어치.
SK㈜는 SK㈜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면 정유사업과 관련 없는 나머지 계열사의 지분을 매각할 수도 있다. 이럴 경우 SK그룹과 오너라는 단어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SK측이 이번 주총에서 승리하더라도 본질적인 위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올해 들어 외국인 지분이 높아졌기 때문에 내년 주총에서 더욱 강력한 도전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SK측이 “내년 표 대결은 더욱 어려울 것이기 때문에 올해 소버린을 포함한 모든 주주를 만족시키는 기업 지배구조를 갖추겠다”고 밝힌 것도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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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기기자 eye@donga.com
김두영기자 nirvana1@donga.com
김용기기자 ykim@donga.com
▼소버린의 실체는 ▼
소버린자산운용의 실체는 아직 명확히 드러나 있지 않다.
소버린측은 “기업지배구조가 불투명해 저평가된 기업에 투자해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장기 투자자”라고 설명했다.
실제 소유주는 뉴질랜드의 챈들러 형제라는 사실만 알려져 있을 뿐 정확한 투자대상과 수익률 등은 베일에 가려있다. 다만 재산이 1조원은 넘는다는 소문이다.
소버린과 유사한 헤지펀드나 사모투자펀드(Private Equity Fund)는 다수의 투자자에게서 돈을 모은 뒤 이를 대신 투자하는 성격을 갖고 있다. 회사를 인수할 때는 자기자본도 들어가지만 대출비중이 높은 편이다.
소버린은 이와 달리 챈들러 형제의 개인돈만으로 투자하며 대출을 받지도 않는 독특한 형태를 띠고 있다. 소버린측 관계자는 “순전히 개인의 돈만을 투자하기 때문에 다른 펀드처럼 수익률을 공개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챈들러 형제는 뉴질랜드 해밀턴 태생으로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소매점을 처분해 1980년대부터 신흥시장(Emerging Market)에 투자했다. 첫 성공작은 홍콩의 부동산시장. 부동산 거품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팔아 막대한 수익을 남긴 후 남미로 옮겨 브라질에 투자했다.
90년대 초 동유럽 국가들이 정치적 변혁과 함께 흔들리자 체코에 투자했다가 러시아로 옮겼다. 이곳에서 최대 가스회사인 가스프롬에 투자해 기존 경영진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으며 지난해 초 한국에 상륙했다. 첫 투자대상은 국민은행이었지만 주가 상승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 곧 팔았으며 두 번째로 SK㈜를 골랐다.
소버린의 그동안 움직임을 보면 이들이 한국의 기업과 법률 사정에 정통하고 매우 정교한 인수합병(M&A)전략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한국적 정서를 감안해 자신들의 행동이 적대적 M&A로 비치는 것을 꺼린다. 이사 후보를 모두 한국인으로 추천한 점이나 이번 주주총회의 표 대결도 적대적 M&A가 아니라 “SK측이 주주 이익을 무시하는 경영을 해왔기 때문에 전체 주주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행동에 나선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도 그런 이유. 지난해 4월 소버린이 SK㈜의 주식을 장내에서 매집한 이후 국내에서는 ‘단기이익을 추구하는 펀드’라는 분석이 많았다. 그러나 소버린측은 ‘장기 투자자’임을 공언했고 현재까지는 그 약속을 지키고 있다.
한편 국내 전문가들은 이번 주총 대결을 적대적 M&A의 한 과정으로 보고 있다.
기업지배구조개선지원센터 정광선 원장은 “적대적 M&A는 보통 장내 주식 매집, 공개매수, 전환사채 등을 통한 주식 취득과 위임장 쟁탈전의 과정을 거친다”며 “이번 사례는 장내 주식 매집과 위임장 쟁탈전이 결합된 방식의 적대적 M&A로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서강대 박영석 교수(경영학과)는 “경영진의 퇴진을 요구하고 임기가 만료되는 전체 이사에 대한 후보 추천을 했으므로 이미 소버린이 적대적 M&A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김용기기자 ykim@donga.com
김두영기자 nirvana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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