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투자자 경영권 장악 "주주간섭 싫다" 脫증시 잇따라

  • 입력 2004년 2월 23일 18시 57분


미국 씨티그룹이 23일 공개매수를 통해 한미은행 주식 100% 확보를 선언했다. 다음 수순은 한미은행의 ‘자진 상장폐지’가 확실시된다. 한미은행뿐만 아니다.

외국계 회사가 경영권을 장악한 상당수 기업이 증시를 떠났거나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증시에서 자금을 추가 조달할 필요가 없고 공시의무 등 주주에 대한 부담도 크다’는 게 이들 기업이 밝힌 시장 탈퇴 이유다.

지배구조 개선을 통해 시세차익을 낼 수 있는 기업이라면 증시에 남아있는 게 유리하지만 씨티그룹의 경우처럼 한국 금융시장에서의 점유율 확대가 한미은행 인수의 최종 목표라면 상장폐지가 유리할 것이라고 증권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주주간섭을 받지 않고 독자적인 경영활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시장이 싫다’=거래소 상장기업 중에는 94년 미국 나이키사가 경영권을 인수한 삼라스포츠가 자진 상장 폐지한 후 모두 6개사가 자발적으로 증시를 떠났다. 쌍용제지(외국계 대주주 P&G) 한국안전유리(한국세큐리트) 대한알미늄(알칸) 송원칼라(클라이언트)에 이어 작년 10월에는 론스타가 인수한 극동건설이 공개매수를 통해 소액주주 지분을 인수한 뒤 자진 상장 폐지했다.

코스닥시장에선 모토로라가 인수한 어필텔레콤이 99년 1월 자진 등록 폐지 신청을 낸 것이 첫 번째 케이스. 이후 전진산업(외국계 대주주 롱프라우) 캡스(타이코 인터내셔널) 동방전자산업(타이코파이스트 홀딩스) 케이디엠(존슨콘트롤스) 케미그라스(애실로 코리아) 한일(리어오토모티브서비스) 등 7개사가 시장을 떠났다.

인터넷 경매업체 옥션(최대주주 이베이)은 작년 11월 추진한 공개매수가 실패하는 바람에 등록 폐지를 잠시 접어둔 상태. 이철재 코스닥위원회 등록심사부장은 “이사회와 주총을 통해 자진 상장·등록 폐지를 결의하고 공개매수 등 소액주주 보호를 위한 절차를 밟으면 자진퇴출 신청을 막을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외국인 최대주주 기업이 증시 떠나는 이유=SK㈜와 경영권 경쟁을 벌이고 있는 소버린자산운용은 “SK의 지배구조 개선이 목표일뿐 경영권에는 관심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를 액면 그대로 믿는 투자자는 거의 없다는 게 대다수 증시전문가들의 생각이다.

조병문 LG투자증권 연구원은 “주주가치를 옹호하던 외국인들도 경영권을 확보한 이후에는 독점적인 이익극대화에 더 신경을 쓴다”고 말했다.

외국인들이 70∼80%의 지분을 확보하려는 것도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주주들의 임시 주총 소집요구를 원천봉쇄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경영투명성을 적극 주창하던 이들도 ‘주주간섭’은 싫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철재 부장은 “증시에 상장 등록하는 이유는 자금조달이 쉽기 때문이다. 자금이 풍부하다면 구태여 증시에 남아있을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상장 폐지 전에 소액주주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공개매수 기회를 제공한 만큼 ‘증시에 남아있든, 떠나든’ 그것은 해당 기업의 자유라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홍성국 대우증권 투자분석부장은 “우량기업의 ‘탈(脫)증시’ 추세는 증권시장의 위축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강운기자 kwoon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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