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VVIP "당신은 VIP보다 고귀합니다"

  • 입력 2004년 2월 26일 16시 13분


VIP가 대중화된 요즘 소수의 VVIP는 한 단계 더 높은 서비스를 원한다. 도어맨부터 영업이사까지 서울 그랜드 힐튼 호텔 직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그들만을 위한 '특별하고 극진한' 서비스 이미지를 연출했다. 이종승기자 urisesang@donga.com

VIP가 대중화된 요즘 소수의 VVIP는 한 단계 더 높은 서비스를 원한다. 도어맨부터 영업이사까지 서울 그랜드 힐튼 호텔 직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그들만을 위한 '특별하고 극진한' 서비스 이미지를 연출했다. 이종승기자 urisesang@donga.com

서울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호텔의 호화별채 애스턴하우스에 고급 승용차들이 속속 들어선다.

명품 브랜드 크리스티앙 디오르가 특별 관리하는 소수 정예 고객 25명을 대상으로 패션쇼가 열린 것이다.

고객들은 국내 톱모델 8명이 우아한 워킹으로 선보인 봄여름 신상품 30여벌을 직접 만져 보며 감상했다. 1인당 20만원 상당의 코스 요리가 나오는 동안 사교성 대화가 이어졌다.

이미 다른 브랜드의 소규모 패션쇼에서 서로 안면을 익힌 사이다. 고객들은 마음에 드는 옷의 배달을 주문한 뒤 5만원 상당의 ‘가벼운’ 향수 선물을 받아들고 총총 헤어졌다.

이른바 ‘VVIP(Very Very Important Person)’이다. VIP가 흔해진 요즘 VIP 중 다시 상위 일부만을 위한 맞춤 서비스와 소비패턴이 등장하고 있다.

○ VIP 내부의 계층화

국내에서 VIP 마케팅이 본격화한 시기는 1990년대 중반이다. 상위 20%의 고객이 80%의 수익을 낸다는 ‘파레토의 법칙’이 적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고급 이미지를 원하는 소비자의 욕구와 끊임없이 소비를 창출하려는 기업의 계산이 맞물려 빠르게 확산된 VIP 마케팅은 지나치게 많은 VIP를 탄생시켰다.

한미은행 ‘한미 비자 플래티넘 카드’의 회원은 8만5000명이다. ‘월 소득 200만원 이상’이라는 비교적 평이한 가입 조건이 플래티넘의 ‘고귀하고 특별한’ 성격을 희석시킨 것이다.

이 은행은 대신 ‘기업체 임원 이상, 연간 소득 1억원 이상’ 등 까다로운 조건을 내건 ‘비씨 비자 플래티넘 카드’ 제도를 별도로 운영한다. 회원 1만8000명. 같은 플래티넘 카드라도 격이 다르다.

웨스틴 조선호텔의 ‘VIP 카드’ 회원은 10만명. 하지만 ‘진정한’ VVIP는 수백명에 불과하다. 이들은 카드로 신분을 입증할 필요가 없다. 호텔 직원들이 고객의 얼굴을 미리 익혀 로비에서부터 개인전용 호텔에 온 것 같은 극진한 대접을 하기 때문이다.

시중은행들은 일반적으로 한 달 평균 예금 잔액 5억원 이상 고객을 VVIP로 간주한다. 은행별로 1000∼2000명 규모로, 50대 이상의 퇴직자 또는 부동산으로 돈을 번 자영업자가 대부분이다. 이들의 예금액은 은행 전체 운용 펀드의 80%, 방카쉬랑스(은행 판매 보험)의 90% 이상에 이른다.

유통업계에서는 매출 실적을 기준으로 삼는다. 명품 패션 브랜드는 연간 구매금액 1억원 이상이면 VVIP로 관리한다. 한 수입 승용차업체는 월소득 3000만원 이상의 46∼55세 남성, 자산 20억원 이상으로 잡고 있다.

LG경제연구소 박정현 연구원은 “중상층 내부에서도 다시 계층이 세분화하면서 기업들이 VIP 중의 VIP인 VVIP들을 중시하는 동시에 VIP의 저변 확대를 꾀하고 있다”고 말했다.

○ 특별한 소비, 특별한 서비스

전체적으로 소비 수준이 높아지면서 명품 브랜드를 한두 개쯤 구입하는 것으로 특별 대접을 받는 시대는 지났다.

VVIP는 흔해 빠진 명품 브랜드 대신 해외여행 등을 통해 그들끼리만 알 수 있는 외국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를 찾기도 한다. 명품 브랜드는 매 시즌 ‘리미티드 에디션’이라는 이름의 한정판매 모델을 내놓고, ‘나만의 것’을 원하는 이들의 경쟁적인 예약 주문을 기다린다.

조만간 서울에 선보이는 별 6개급 세계적 최고급 호텔도 정확히 이들을 겨냥한 것이다. 과거 VIP만의 사교공간에서 어느덧 보통사람들의 만남의 장소가 된 국내 특급 호텔들은 더이상 ‘특별한’ 이미지를 원하는 VVIP의 성에 차지 않는다.

BMW 코리아가 로드스터 마니아들을 위해 최근 서울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 호텔에서 개최한 명품 브랜드 겐조의 패션쇼. 젊고 자유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추구하는 100명 안팎의 소수 고객을 초대했다. 사진제공 BMW 코리아

기존의 서울시내 특급 호텔들도 VVIP를 전담 관리하는 ‘GRO(Guest Relations Officers)’라는 이름의 고객 관리팀을 따로 운영한다. 이들 업무는 연간 2, 3개월 숙박하는 VVIP의 특별하고 까다로운 요구에 응대하는 것. ‘우리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We make it happen)’는 것이 이들의 모토다.

서울 강남구 도곡동 타워팰리스는 2000년대 VVIP의 주거 공간으로 떠오른 곳이다.

부동산 정보업체 스피드뱅크 안명숙 소장은 “과거 성북동 평창동 등 고급 단독주택 단지가 ‘자기 공간에 대한 만족’이라는 점에서 인기를 얻었다면, 타워팰리스는 한정된 공간에서 피트니스 클럽 등 단지 내 원스톱 부대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매력이 있다”고 말했다.

한편 VVIP들은 ‘차별화된 소수’라는 의식을 갖고 동질 그룹 내에서 삶을 즐긴다.

골프웨어 브랜드 먼싱웨어가 몇 년째 개최하는 여고 동창회 골프대회는 중년층 여성 VVIP들로부터 호응을 얻고 있다.

일본 수입차 렉서스를 판매하는 일부 딜러업체는 의사들의 세미나를 지원하며 렉서스를 소유한 의사들끼리의 유대감을 형성하는 데 힘쓰고 있다.

브랜드에 집착하는 VIP들과는 달리, 이들은 브랜드 충성도가 그리 높지 않다.

화장품 브랜드 랑콤의 VVIP 회원인 김미자씨(40)는 “치장하지 않은 차림으로 모 브랜드 매장을 방문했다가 종업원의 태도가 불친절해 곧바로 랑콤으로 바꿨다”며 “브랜드로 나를 과시하기보다는 나를 위해 존재하는 듯한 서비스를 찾게 된다”고 말했다.

이들이 고급문화와 웰빙에 대한 관심이 높은 점을 감안해 대부분 기업들은 클래식 공연 관람권, 고급 와인, 건강 검진권 등을 수시로 제공한다.

○ VVIP를 보면 세상이 보인다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2002년 최고 VVIP는 20대 후반의 유흥업소 직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지난해 VVIP 명단에서 빠졌다. 유흥업소 매출이 줄면서 구매실적도 떨어졌기 때문.

VVIP는 사회적 신분보다는 경제적 구매 실적으로 선정되기 때문에 경기를 가늠하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호텔의 VVIP 라운지가 붐비면 경기가 살아난다는 증거이다. 밤늦게까지 중요 계약 성사 기념 파티가 열리면 호황기인 셈이다.

VVIP 소비의 주도권이 남성에서 여성에게로 빠르게 옮겨지는 추세도 주목할 만하다.

최근 고급 아파트, 승용차, 호텔, 크루즈 여행 등을 선택할 때 의사 결정권은 대부분 여성에게 있다.

여성은 또래 집단의 입소문에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소비의 파급 효과가 크다. 명품 패션 브랜드 담당자들은 스스로 경제력을 갖춘 고임금 직장 여성이 VVIP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밝힌다.

때문에 각 기업들은 여성 고객을 잡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다. BMW는 지난해 봄 고급 세단 760Li를 발표하면서 파리 오트쿠튀르 출신의 디자이너 ‘지해’의 드레스를 함께 선보였다. 캐딜락을 판매하는 GM코리아는 씨티은행 우수 고객을 대상으로 ‘르 코르동 블루’의 요리 강습회를 열기도 했다.

온 나라 백성이 먹을 빵이 없어 굶주린다는 말을 듣고 “그럼 케이크를 먹으면 되겠다”고 말한 18세기 프랑스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 시대의 호사롭던 케이크는 이제 대중 음식이 됐다.

브랜드 충성도보다 서비스 충성도가 더욱 가속화하는 시대. 어쩌면 소비자 개개인이 뛰어난 소비 안목과 높은 기대 수준을 지닌 ‘VVIP 사회’가 실현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김선미기자 kimsunmi@donga.com

김재영기자 jay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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