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정부는 경제정책의 방향을 잡고, 과제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데 아직도 자신이 없거나 헷갈리는가. 그래서 국제기구 지도자나 해외 석학의 지혜를 더 빌리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나.
아니면 경제 실정(失政)에 대한 국내의 비판이 지긋지긋해 외국인들 모셔 덕담이라도 듣고 싶었나. 혹은 따놓은 예산도 써야 되고, 현 정부 1주년이 됐으니 타이밍도 그럴듯해 ‘경제 쇼’ 한번 더 한 것일 뿐인가.
▼숙제가 뭔지 따지기만 하는 정부 ▼
우리 경제의 현실이 어떻고, 중점적으로 풀어야 할 숙제가 무엇이며, 그것들을 어떤 수단으로 해결해야 할지 정부가 진짜 모르고 있는지 우선 궁금하다. 정부가 현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따라서 해법도 모르는 게 사실이라면 1년간 만들었다는 250개나 되는 로드맵은 대부분 ‘모래성’일 뿐이다.
그게 아니고 우리 경제를 꿰뚫고 있다면, 외국인 초청해 ‘한 소리 또 하고, 들은 소리 또 들을’ 것이 아니라 가장 시급한 각론 정책 추진하는 데 13억2000만원을 보태는 게 옳다. 물론 이런 국제회의는 유용한 점이 있고, 어렵게 초청한 외국인들의 지혜를 빌릴 것은 빌려야 한다.
하지만 작년에도 비슷한 규모와 내용의 국제회의를 두 번 열었으나 거기서 어떤 탁견을 들어 정책에 반영했는지 흔적이 없다. 작년 6월 주제도 똑같은 ‘참여정부 경제비전 국제회의’에서 석학 로버트 배로 교수는 “한국이 현재의 정책과 제도를 지속하고 유럽형 분배위주 정책을 따라간다면 4% 성장도 어렵다”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정부는 성장의 걸림돌을 치우고 기업의 활력을 높이기 위한 방안을 구체적으로 동원하는 데 지극히 게을렀거나 무능했다.
청와대나 경제부처 사람들은 우리 경제의 과제를 줄줄 외지만 그러면 뭐 하나. 꼭지를 따지 않으니 제자리에서 맴돈다. 외국 석학들이 새삼 얘기 안 해도 국내 전문가들이 수없이 경제현실을 진단하고 ‘행동하는 정책’을 주문해 왔다. 그 점에서 부족한 게 없다. 외국인들이라고 해서 국내의 누구도 찾아내지 못한 비책(秘策)을 내놓은 것도 없다.
요컨대 외국인의 상식적 훈수나 듣고 맞장구칠 시간에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 규제 완화 같은 당면 현안의 실제적 변화를 만들기 위해 뛰라는 것이다. 허구한 날 “하겠다”고만 되뇌고 진전을 보여주지 않으니 문제다. 중소기업 하나 창업하는 데 필요한 행정절차와 비용과 소요기간이 경쟁국의 5배, 10배나 되는 현실을 깨는 것이 노무현 대통령이 그렇게도 강조하는 ‘변화’ 중의 변화다.
지난주 회의에 온 도널드 존스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사무총장은 “직접투자를 유치하기 위해서는 예측 가능한 노사관계가 필수조건”이라고 했다. 새삼스러운 발견도 아니다. 노사관계 안정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것은 그만해도 된다. 예측 가능한 노사관계를 정착시키기 위해 필요하다면 대통령부터 몸을 던져 이해당사자들을 설득하고, 경제살리기를 위한 진정한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것이 했어야 했고, 해야 할 일이다.
▼행동과 결과로 말하라 ▼
지난해 7월 ‘차세대 성장산업 국제회의’에서 쏟아진 ‘한국이 5년 뒤, 10년 뒤에 무얼 먹고 살 것인지’에 대한 의견들은 정책으로 살아났는가. 10대 성장동력산업을 고르기만 하면 무슨 소용인가. 그런 정도는 기업과 호흡을 함께 하는 민간연구소들이 더 잘 찾아내 리포트도 더 근사하게 쓸 수 있다. 정부가 할 일은 기업들이 새로운 성장산업에 돈을 넣고, 이익을 위해 밤낮 없이 뛰도록 여건을 만들어 주고 정책으로 받쳐 주는 것이다.
정부는 과연 기업의 기를 살리고 기업이 하고 싶은 일 신나게 하도록 북돋우고 있는가, 아니면 ‘나쁜 놈 잡아내고, 발목잡을 일 찾고, 그래서 결국 기업 주눅 들게’ 하는 데 더 관심이 있나. 정부는 제발 토론과 말로만 일한다는 소리 그만 듣도록 행동으로 말하고 결과로 말하라.
배인준 수석논설위원 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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