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량살상무기에 대한 아무 증거 없이 이라크를 공격한 ‘미국식 수사’ 아니냐. 이렇게 하면 기업만 골병든다.”(A기업 임원)
지난해 11월 7일 오후 11시경 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검 중앙수사부 11층 조사실. 수사팀 검사와 기업 임원이 ‘기(氣) 싸움’을 하고 있었다. 검찰은 이날 밤 결국 별다른 진술을 확보하지 못하고 이 임원을 돌려보냈다.
▽기세 싸움=당시 검찰은 SK에 이어 삼성 LG 현대자동차 롯데 등으로 수사를 확대해 대선자금 전모를 밝혀내겠다고 선언한 지 한달이 지났지만 실적은 거의 없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정치권의 보복을 의식해 기업들이 한사코 입을 열지 않았던 것.
지난해 11월 말경 검찰에 소환된 B기업 임원에 대해 수사팀의 한 관계자는 “대선자금 제공 자료를 내놓지 않으면 비자금 수사를 통해 기업의 비리를 근본적으로 파헤치겠다”며 마지막 압박카드를 내놓았다. 그러자 그 임원은 “검찰이 조폭이냐, 옛 사헌부냐. 법률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이렇게 나올 수 있느냐”며 항변하기도 했다.
수사팀이 반전의 계기를 마련한 것은 지난해 12월 초 노무현(盧武鉉) 캠프와 한나라당의 계좌를 역추적하는 등 수사의 실마리를 정치권에서 찾는 방식으로 전술을 바꾸면서부터. 드디어 이회창(李會昌) 전 한나라당 총재의 법률고문을 지낸 서정우(徐廷友) 변호사가 긴급체포되는 등 대어(大魚)가 걸렸다.
▽삼성의 벽을 넘어라=수사의 핵심은 역시 ‘삼성이 노 캠프에 준 불법자금’. 그만큼 검찰의 추궁도 거셌다. 그러나 최근까지 검찰에 소환된 삼성 구조조정본부의 김인주(金仁宙) 사장은 이 문제가 나오자 음식물을 토하며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주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노 대통령의 고교 동창인 이학수(李鶴洙) 삼성 부회장이 검찰에 나온 지난달 26일 밤. 수사 진척을 애타게 기다리던 안대희(安大熙) 중수부장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당시 외부인과 저녁식사를 하던 안 부장이 속삭였다.
“뭐라고? S가 드디어 불었어?”
당장 검찰 주변에서는 ‘삼성이 드디어 노 캠프 관련 진술을 시작했다’는 말이 돌았다. 하지만 사흘 후 S는 ‘삼성’이 아닌 ‘신동인(辛東仁·롯데쇼핑 사장)’의 이니셜임이 밝혀졌다. 삼성의 자복을 고대하던 분위기가 만든 해프닝이었던 것.
▽수사팀 애환=수사가 장기화되면서 수사비도 모자랐다. 수사팀은 저녁마다 김치찌개만 주문했고 음식점에서는 지프차량으로 찌개를 대량 배달했다. 어둠이 깔리면 검찰청사 엘리베이터에서는 김치찌개 냄새가 진동했다. 참고인과 피의자들은 “김치찌개에 질려 서초동에 가기 싫다”고 불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타고난 김치찌개 체질’도 있었다. 126일 동안 사생활을 반납한 수사팀의 문효남(文孝男) 대검 수사기획관과 남기춘(南基春) 대검 중수1과장은 이 기간에 몸무게가 각각 3kg, 8kg 늘었다.
정위용기자 viyonz@donga.com
이태훈기자 jeff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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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자금 수사 통계 | |
항목 | 내용 |
수사 기간 | 6개월(2003년 9월 초∼2004년 3월 8일) |
수사팀 규모 | 검사 20명, 수사관 80명 등 총 100명. 사상 최대 |
수사 대상 | -여야 정당 및 대선 캠프-삼성 LG 현대차 SK 등 10대 그룹을 포함한 수십개 기업 |
수사 경비 | -10억원대(수사 착수 이후 5억∼10억원대 예비비 추가 청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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