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이후 급속한 사회경제적 변동 속에서 태어난 재벌은 한국 사회에 뚜렷한 공과(功過)를 남기며 한국경제와 그 운명을 함께 해 왔다.
한림대 정치외교학과 김인영 교수(44)가 김주연(20·서울대 국민윤리교육과 2년), 임영빈씨(20·고려대 경영학부 2년), 박나래양(17·이우고교 2년)과 함께 한국현대사 속 재벌의 빛과 그림자, 그리고 그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재벌과 민주화
▽김인영 교수=‘재벌’이란 원래 ‘금융파벌’ 또는 ‘금융집단’이란 뜻이지만 한국에서는 가족이 소유하고 지배하는 다각화된 거대 복합기업이란 의미로 쓰여요. ‘가족 자본주의(Family Capitalism)’란 독특한 한국적 경영형태지요.
▽김주연=재벌은 광복 뒤 적산(敵産)을 불하 받으면서 형성됐다고 들었어요. 재벌이 초기 자본축적 단계에서 압축성장을 하면서 정경유착 같은 병폐도 계속됐다고 하더군요.
▽임영빈=최고경영자(CEO)와 기업주가 같다는 점이 문제라고 봅니다. 기업의 투명성이 낮으니까 같은 품질의 제품이더라도 저평가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Korea Discount)’라고 한다지요.
▽김주연=‘잘 살아보자’는 깃발을 내세운 국가 주도의 경제정책 아래서 살을 찌운 재벌이 경제발전에 기여한 바는 크지만 사회·민주적 발전이라는 측면에서의 질적 기여는 미흡하다고 봅니다.
▽김 교수=기업이 발전하면서 주식을 공개하긴 하지만 가족이나 총수가 계속 경영을 맡습니다. 가족이나 총수의 지분이 5% 정도에 불과하면서도 전권을 행사하지요. 책임은 대부분 주주들이 지므로 책임과 권한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예요. 권력의 집중을 푸는 것이 정치의 민주화라면 부의 집중을 푸는 것은 재벌 민주화지요. 미국도 18∼19세기 초 자본 축적시대에는 록펠러 같은 재벌이 아주 악랄하게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러나 1세기를 넘기지 못하고 기업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면서 칭송을 받았지요.
▲재벌과 사회정의
▽박나래=재벌이라고 하면 일단 안 좋은 인상이 들어요. 자기들끼리만 돈 벌고 살아가는 것으로 보이거든요. 하지만 해악만 끼친 것은 아니라고 봐요. 경제를 살리는 데 기여가 컸으니까요.
▽김주연=삼성의 편법증여 등을 비판하면서도 그 회사의 전자제품을 선호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이것은 역시 재벌이 자본을 투자해 선진기술을 개발한 결과겠지요.
▽박=우리 사회가 부를 쌓는 사람들에게 부정적이라는 것도 문제예요. 부의 축적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김 교수=우리에게는 재벌 또는 부의 축적에 대한 이중적 인식이 있지요. 평가도 이중적이고요. 정부도 집권 초에는 ‘재벌 길들이기’를 내세우지만 점점 재벌 위주 산업정책으로 전환하곤 합니다. 재벌도 탈법적 부동산 투기를 하는 한편 첨단산업에 집중하기도 하지요.
▽김주연=그렇다고 재벌에 무조건 사회 환원을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재벌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정경유착이나 자금독점 등으로 사회에 해악을 끼치지 않는 것이지요. 다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봅니다.
▽임영빈=기업의 존재이유는 가치를 창출해 돈을 많이 버는 것이지만, 사회가 유지되는 덕택에 재벌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므로 사회에서 받은 것 이상으로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 교수=미국 마이크로소프트는 독점판결을 받았지만 빌 게이츠는 세계 최대 기부자입니다. 물론 기업의 존재 이유는 고용증진과 사회편익이겠지만 이익의 상당부분을 사회에 환원한다면 이미지는 더욱 좋아지겠지요.
▲견제와 균형
▽임영빈=최근 상황을 보면 재벌 경영이 가치 창출에 실패한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언제까지 대기업 중심으로 파이를 키울 것인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외환위기가 대기업의 투명성을 높일 수 있는 기회였지만 오히려 자생력 약한 중소기업만 도산했어요.
▽김 교수=국경 없는 세계가 이뤄지면서 세계화·전문화한 대기업은 필요합니다. 자생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의 기반은 당분간 대기업의 하청산업에서 찾아야겠지요.
▽박=우리 사회가 민주화 투쟁을 통해 변해왔다면 이제는 경제에서도 그 결과물을 봐야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정경유착이 가장 큰 문제인데 이를 정치권이 개혁하기는 어렵다고 봐요. 시민사회가 바꿔야 하겠지요.
▽김 교수=재벌 스스로 기득권을 포기하기는 어렵겠지요. 그래서 견제세력이 필요합니다. 내부적으로는 이사회나 주주총회, 외부적으로는 시민단체가 중요합니다. 민주화의 기본인 견제와 균형이 경제에서도 이뤄져야겠지요.
▽임영빈=재벌이 부를 부당하게 축적했을 것이라는 이미지가 너무 강합니다. 기업이 돈을 벌어 여러 분야에 적절히 투자하거나 부의 분배를 제대로 한다면 좋은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문제겠지요. 족벌체제로 계속 가면 망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야 합니다.
▽김주연=선진국에서는 부자를 칭송한다고 해요. 부의 축적을 자기 노력과 성실의 결과라고 보니까요. 한국은 재벌이 카드사업 등 투기성 사업까지 하면서 신용불량자 양산에 한몫 하잖아요. 좀 더 생산적인 산업에 집중해야 할 것 같아요.
▽김 교수=개발시기의 정부는 경제를 주도해야 했지만 민간 부문이 증대한 지금의 정부는 심판 역할을 해야 합니다.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페어플레이를 하도록 해야죠. 잘못했을 때는 페널티를 주고 무너질 기업은 무너지게 해야지요. 서민의 돈으로 대기업을 살리는 것은 경제정의에 어긋납니다. 시민사회는 올바른 감시자 역할을 맡아야 합니다.
정리=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한국 재벌에 대해 읽어볼 만한 책▼
●한국의 경제성장(김인영·자유기업원)=삼성그룹의 자본축적을 한국의 경제성장사와 연관시켜 서술. 기업가 정신을 강조.
●재벌 : 성장의 주역인가, 탐욕의 화신인가?(강철규 최정표 장지상·비봉출판사)=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창립 멤버였던 저자들이 재벌성장을 비판적 측면에서 서술하고 재벌구조 개혁의 방안을 제시. 재벌의 어두운 면을 꼬집어 지적.
●재벌과 정치(박병윤·한국양서)=한국 재벌 성장의 이면사. 언론인이었던 저자가 기업과 정부 부처를 찾아다니며 취재한 재벌과 정부의 유착과정.
●한국재벌연구(조동성·매일경제신문사)=한국 재벌과 다른 나라의 재벌을 비교하면서 재벌의 효율적 측면과 비효율적 측면을 고찰.
●한국재벌형성사(이한구·비봉출판사)=한국의 재벌들을 기업사의 측면에서 서술. 수집 가능한 다양한 자료들을 이용해 재벌들의 자본축적사를 정리.
●호암자전(이병철·중앙일보사)=삼성그룹 창업자 호암 이병철의 자서전. 일제말기 기업활동을 시작해 1980년대까지 삼성을 키우고 이끌어온 이야기.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정주영·제삼기획)=현대그룹 창업자의 자서전. 현대를 창업하고 키우기까지 불도저 같은 활동을 기록.
●나누면서 커간다(유승민·미래미디어)=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일하는 경제학자가 정부에 재벌정책을 조언하면서 느낀 생각들을 담았다. 쉬운 표현을 사용하면서 중립적 태도로 재벌을 진단하고 앞으로의 길을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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