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84/GDP 1조달러 국가로]<3>정부규제의 폐해

  • 입력 2004년 4월 2일 17시 47분


《1980년대 꽤 오랫동안 면도기가 ‘중소기업 고유 업종’으로 지정된 적이 있다. 정부가 중소기업 활성화를 위해 대기업의 시장 진입을 제도적으로 차단한다는 명분으로 취한 조치였다. 하지만 이 조치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 면도기 시장이 외국의 대형 업체에 장악돼 기술력과 자본력이 취약한 중소기업이 대거 퇴출된 것이다. 국내 면도기 시장 규모는 연간 600억원 안팎(숙박업소 공급량 제외). 이 가운데 다국적 기업인 질레트와 쉬크가 현재 70%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 업체의 비중은 30%에 그칠 뿐이다. 그나마 도루코를 빼면 변변한 면도기 전문 중소기업이 없다. 홍익대 김종석(金鍾奭·경제학) 교수는 “면도기 시장 진입 규제는 시장원리를 거스르는 정부의 개입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보여줬다”며 “중소기업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정책도 경쟁에 반하면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경기 침체가 장기화하면서 ‘규제 개혁’이 정부 정책의 화두(話頭)가 됐다. 규제를 풀어 기업을 활성화하겠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규제 완화’ 구호를 넘어 정부의 인식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규제를 없애는 것도 중요하지만 규제의 영향을 측정하고 이를 통해 규제의 품질을 높이는 작업도 병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관련기사▼

- <1>實事求是의 시대
- <2>생산성은 제자리
- <4>反기업정서의 덫
- <5>서비스업 후진국

▽다시 늘어난 규제=규제개혁에서 정부의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은 규제의 증감(增減) 추이에서도 잘 드러난다.

규제개혁위원회에 따르면 1999년 1월 규제는 총 1만362건. 당시 김대중(金大中) 정부는 규제개혁을 내걸고 규제 건수를 2년 뒤 6910건으로 낮췄다. 일단 형식적으로나마 규제가 줄어든 셈이다.

기업활동에 대한 정부 규제는 공무원들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건축 관련 법령의 경우 80여개에 이른다. 더구나 이 가운데 상당수는 심의 기준이 모호해 건축 허가가 난 뒤에도 18%가량의 건축물이 위법 판정을 받기도 한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하지만 그 후 다시 정부 규제가 늘기 시작했다. 2002년 1월 7246건, 2003년 1월 7541건에 이어 올해 3월 말 현재 7800건을 넘어섰다.

산업연구원(KIET) 김도훈(金道薰) 산업동향분석실장은 “규개위나 규제개혁기본법 등 선진국 수준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놓고도 규제가 다시 증가하고 있는 현실은 정부가 여전히 ‘개입과 통제’의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국가 경쟁력 저하=규제의 질도 문제다. 대표적인 사례가 중복규제. 정부 부처 등 행정기관 간 영역확보 싸움의 결과물이다.

제조사업장 안전관리의 경우 노동부의 ‘산업안전보건법’에서 총괄하고 있다. 하지만 사고 처리 과정까지 포함하면 각 부처가 주관하는 60개의 법률이 얽혀 있다.

공무원들의 재량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모호한 규제도 여전하다. 규개위에 따르면 건축 관련 법령은 건축법을 포함해 80여개에 이른다. 이 가운데 상당수가 심의 기준 등이 불명확해 곳곳에서 마찰을 빚고 있다. 실제 2001년 건축 허가된 14만6000동 가운데 18%인 2만6000동에서 법령 위반에 따른 분쟁이 발생했다.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는 규제는 국가 경쟁력 저하로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민간부문이 규제를 희망하는 웃지 못할 ‘촌극’까지 나타난다. 99년 규개위가 산업자원부가 주관하는 품질보증체제(ISO9000) 인증 업무를 민간기구로 이관키로 하고 한국품질환경인증협회에 의뢰했지만 협회가 ‘아직 업무를 넘겨받을 형편이 안 된다’며 난색을 표시한 적도 있다.

▽정부 역할 바뀌어야=전문가들은 규제 증가의 근본 원인은 관료사회 자체가 거대한 이익집단이 됐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정부가 스스로 덩치를 키우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결과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규제개혁은 정부 개혁과 병행돼야 한다는 견해가 많다.

실제로 정부 규제가 다시 늘어나기 시작한 2002년 국가 공무원도 증가세로 반전돼 올해 1월에는 58만명에 육박하고 있다.

정부는 인구 1000명당 공무원 수가 18.5명에 불과해 일본(31.2명), 미국(70.4명)보다 크게 낮은 수준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5만1500명에 이르는 공기업 종사자와 151만명이 넘는 산하기관 근무자가 빠져 있다.

한국경제연구원 조성봉(趙成鳳) 선임연구위원은 “각 정부 부처가 산하기관 조직을 확대하고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여기저기서 규제를 만들다보니 중복규제의 문제까지 발생한다”며 “정부의 군살을 빼지 않으면 규제의 군살도 빠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서울대 행정대학원 최병선(崔炳善·행정학) 교수는 “한국에서 무슨 무슨 ‘촉진법’은 속내용을 들여다보면 ‘규제법’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국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과감한 규제 철폐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특별취재팀▼

권순활 경제부 차장(팀장)

고기정 공종식 송진흡 신치영

차지완 김창원 기자(경제부)

◇독자 의견과 제보를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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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성공사례▼

영국은 관료주의적 정부 조직에 기업 경영원리를 도입해 행정 서비스의 획기적 개선과 규제개혁에 성공한 대표 사례로 꼽힌다.

영국 정부는 1988년 각 부처와 산하기관에서 행정 집행업무를 따로 분리하는 ‘책임운영기관(에이전시·Agency) 모델’을 도입했다. 각 에이전시는 독립채산제로 운영되며 조직 관리와 인사, 재무 등에서 광범위한 자율권을 보장받는다.

반면 매년 성과목표와 사업계획을 작성해 중앙정부에 보고해야 하고 에이전시 기관장이 장관과 체결한 기본계약문서는 최소한 3년에 한 번씩 검토해 평가를 받아야 한다. 또 에이전시별로 기업의 사외이사와 같은 외부평가위원들을 임명해 활동과 실적을 감시토록 했다.

2002년 3월 말 현재 영국의 에이전시는 127개 기관. 전체 공무원의 78%인 37만3000명이 근무하고 있다.

에이전시의 종류도 관세청, 이민국, 교도소 등 대규모 조직에서부터 부채관리처(직원 40명) 등 소규모 기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에이전시 모델이 도입되면서 88년 57만명이던 공무원 수도 2002년 3월 말 48만명으로 줄었다.

반면 대민(對民) 서비스는 대폭 개선됐다. 91년 에이전시가 된 여권관리청은 여권 발급 기간을 종전 95일에서 10일로 줄였다. 기업청은 문서처리 기간을 25시간에서 4시간으로 낮췄으며 토지등기청은 에이전시로 바뀐 뒤 등기 관련비용을 40%나 줄인 것으로 집계됐다.

에이전시 모델이 성공적으로 정착된 비결은 △성과목표에 대한 명확한 평가 △결과에 따른 인센티브 △공개적인 보고 체계 등으로 요약된다.

성과목표의 경우 항상 더 높은 수준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여권관리청은 99년 신청인의 여행 날짜 이전까지 여권을 발급해 주는 비율을 99.9%까지 높이겠다는 목표를 제시했지만 중앙정부가 이를 반려했다. 과도한 목표는 행정 서비스의 질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 에이전시의 연차 보고는 국민에게 제공하는 서비스의 범위와 기준은 물론 서비스를 받지 못하면 어떻게 민원을 제기해야 하는지도 알려준다.

▼"핵심규제 풀려야만 시장 활성화 가능"▼

‘우리나라가 무엇을 해서 먹고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여러 방안이 있겠지만 가장 바람직한 것은 정부가 그 해답을 직접 제시하기보다는 기업이 스스로 풀어가도록 하는 것이다.

누가 주도하는 게 옳은지에 대한 논의는 일단 미룬다 하더라도 정부가 대안을 제시하고 정책을 수립하면 그와 동시에 규제와 간섭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미래를 설계하는 과정에서 정부를 제외하자는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절대 그렇지 않으며 정부의 역할은 계속해서 중요할 것이다.

나라별로 정부의 시장 개입 정도를 보여주는 지표에 따르면 한국의 정부 부문 비중은 다른 국가보다 그리 높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의 문제는 정부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한 적절한 구분이 돼 있지 않다는 점에서 찾아야 한다. 따라서 앞으로 정부 역할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향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우선 기업이 ‘무엇을 해서 먹고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푸는 데 장애가 되는 요인을 없애야 한다.

또 기업가 정신을 고취해 다양한 능력과 지혜를 모을 수 있도록 기반시설을 구축해야 한다. 이를 위한 주요 수단이 정부 규제를 개혁하는 것이다. 한국이 규제개혁위원회를 설치한 뒤 각종 규제를 없앴지만 기업이 이를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은 ‘핵심규제’가 대부분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법과 제도를 위반해 주주나 이해관계자, 소비자에게 피해를 주는 기업에 대해서는 엄중하게 제재를 하는 감시자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 이런 원칙이 지켜질 때 성실한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이 구분된다. 또 이는 한국에 팽배한 반(反)기업정서를 누그러뜨리는 데도 도움이 된다.

시장은 정부 역할의 변화를 절실하게 원한다. 근본적인 변화가 없으면 ‘기업하기 좋은 나라’ ‘시장경제 활성화’와 같은 구호는 공허할 수밖에 없다.

고동수 KEIT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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