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시대 가로지르기]<7>이찬근 교수

  • 입력 2004년 4월 4일 17시 33분


이찬근 교수는 “세계시장을 공략하고 초국적 금융자본에 맞서기 위해 재벌의 이익과 지배권을 보장하는 대가로 재벌에 국내 경제 안정을 위한 투자, 고용 창출 등 사회적 책임을 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주일기자
이찬근 교수는 “세계시장을 공략하고 초국적 금융자본에 맞서기 위해 재벌의 이익과 지배권을 보장하는 대가로 재벌에 국내 경제 안정을 위한 투자, 고용 창출 등 사회적 책임을 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주일기자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물결이 점점 거세지는 가운데 급성장하는 중국 경제의 위협도 이미 가시화되고 있다. 국내 증권시장은 외국 자본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기업의 국내 투자는 심각하게 위축되면서 제조업 공동화 조짐마저 나타난다. 한국경제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찬근 인천대 교수(48·국제금융·대안연대회의 정책위원)는 세계화의 흐름을 받아들이되 국내 기업을 중심축으로 삼아야 한다며 ‘줏대 있는 세계화의 길’을 주장한다.》

●재벌의 모순, 위기의 주범이자 변화의 대안

“보수세력과 재벌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주주 중심의 가치관을 도입했지만 이제 이로 인해 기업지배권을 위협받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진보세력은 초국적 금융자본에 국민경제의 물적 기반을 팔아넘길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재벌 해체를 요구함으로써 결국 초국적 금융자본의 배만 불리게 할 판입니다.”

사실상 진퇴양난이다. 정부는 1997년 말 외환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국시장에 글로벌 스탠더드를 도입해 제조업체뿐 아니라 다수의 금융기관까지도 외국자본에 매각하면서 경제 전반의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하지만 이렇게 국내에 들어온 외국자본은 대부분 단기적 투기펀드였고, 이 때문에 한국경제는 단기적 주주이익을 중심으로 움직여가고 있다.

이런 변화를 의식해서인지 외환위기 이후 국내 기업과 금융기관의 해외매각을 주도했던 이헌재 경제부총리조차 최근에는 재계와 금융기관이 함께 사모펀드(PEF·Private Equity Fund)를 조성해서라도 국내의 인수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요 기업에 대한 외국자본의 적대적 인수합병(M&A) 위협, 혹은 시장의 안정을 무시하는 외국자본의 행태에 대한 견제가 필요하다는 인식 때문이다.

개발독재시대부터 정경유착으로 특혜를 받으며 성장한 재벌들의 비효율성이 외환위기의 주 요인으로 지목되며 ‘재벌 해체’ 주장이 거셌지만 이 교수는 “장기 전망을 갖고 적극적으로 고부가가치 투자를 하면서 초국적 자본에 맞설 수 있는 국내의 대안은 사실상 재벌뿐”이라고 지적한다.

●주주이익 극대화와 고용 창출

이 교수는 “국민 경제를 위해 초국적 금융자본으로부터 재벌의 지배권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SK㈜나 삼성물산이 소버린이나 허미스 같은 외국자본에 넘어가면 “이들 외국자본이 주주이익 극대화를 위해 단기적 이익의 창출만 목표로 할 뿐 고용창출에 책임을 느끼겠느냐”는 것이다.

이 교수는 경제력 집중에 따른 재벌의 폐해에도 불구하고 재벌에 대해 막대한 국민적 희생과 국가보조가 주어진 이유는 재벌이 고용창출에 기여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앞으로도 재벌이 지배권 보호를 위한 조치를 바란다면 투자와 고용창출에서 외국자본과 다른 행태를 보이겠다고 사회적 약속을 해야 한다는 것이 이 교수의 주장이다. 세계시장 공략을 위해 재벌의 이익과 지배권을 보장하는 대신 국내 경제의 안정을 위해 재벌의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자는 것이다. 세계화와 국민경제간의 긴장과 충돌은 없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장과 고용창출은 한꺼번에 잡을 수 있는 ‘두 마리의 토끼’라는 이론이다.

●대타협의 가능성

“유럽의 작은 나라들은 1929년 세계 대공황 이후 1930년대에 성장과 고용을 동시에 보장하는 계급 타협에 성공했습니다. 우리나라도 혼미한 경제사정을 해결하기 위해 계급타협 혹은 사회적 타협의 구상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유럽에서는 1935년 노르웨이의 기본협약, 1937년 스위스의 평화협약 등의 사회적 대타협이 성사됐다. 대공황 여파로 일자리가 계속 줄어들자 노사 양측이 모두 위기감을 갖고 대안을 찾았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한국사회에서의 대타협이 대규모 사업장의 정규직만을 대상으로 노동조건 개선과 일자리 안정을 모색하는 좁은 틀의 타협이 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국민경제 전체의 관점에서 어떻게 하면 실물투자를 확대하고 양질의 새로운 일자리를 꾸준히 창출할 것인가에 그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는 것이다.

김형찬기자 khc@donga.com

■ 국가경제 빗장을 풀때

유럽强小國들 자국기업에 우선권

정부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글로벌스탠더드 도입만이 유일한 살 길이라며 미국을 모델로 삼아 국가경제의 빗장을 풀고 달려왔다.

하지만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네덜란드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 유럽의 소국들은 미국 같은 대국과 달리 자국 기업의 입지를 보장하기 위한 여러 가지 조절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스웨덴은 국내 기업의 지배권 방어를 위해 똑같은 주를 갖고도 경영진이 보다 많은 의결권을 행사하도록 ‘차등의결권 주식’을 허용했다. 스위스는 유니버설뱅킹을 통한 기업-은행간 ‘상호주식 보유제’를 채택하고 있다. 노르웨이는 기업의 과대 이윤을 중앙은행에 적립하는 제도를 마련했다.

특히 기업 순이익의 일정 비율을 근로자들에게 배분하거나 적립하는 스웨덴의 ‘연대 임금제도’는 단지 사회적 형평을 위한 제도로서만 아니라 노동자가 함께 기업의 이윤 사용처를 감시함으로써 노사 쌍방 합의하에 비효율적 부분을 정리하는 적극적인 구조조정 장치로도 기능한다.

이런 소국들의 은행은 정부의 산업정책과 지역개발정책의 창구 역을 맡을 뿐 아니라 유동성 위기에 처한 유력 대기업을 구출하는 기능도 한다.

국내 조절기능 없이 대외 개방만 강조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미국과 같은 경제대국의 특수 모델일 뿐 국내시장이 협소하고 대외협상력이 취약한 한국 경제에는 맞지 않다는 것. 따라서 유럽 소국의 모델을 참고로 글로벌스탠더드 혹은 미국식 모델의 한계를 극복하는 ‘정책적 상상력’의 확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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