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학회 이종덕 실장은 “현재 화폐의 모델은 충무공, 퇴계, 율곡 등 남성 일색이어서 여성이 화폐에 등장해야 할 시점”이라며 “신사임당은 한국의 대표적 어머니이자 시대를 앞서가는 여성이어서 가장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학계와 여성계 등에서 여성 위인을 화폐의 모델로 삼자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화폐에 여성을 등장시키려는 것은 화폐 도안이 갖는 상징성 때문. 세계 각국이 화폐에 그 나라가 내세우고 싶어 하는 인물이나 사물을 그려 넣음으로써 화폐의 권위를 돋보이게 하고 이를 통해 자신들의 자부심을 전 세계에 펼쳐 보이고 있다.
국내에서는 광복 이후 78종의 화폐가 발행됐고 이 중 남성은 39번 모델에 올랐지만 여성은 1962년 100환권에 등장한 ‘모자상(母子像)’ 한 번뿐이었다.
현재 화폐에 등장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여성 후보는 신사임당이며 한국은행 자체 조사에서도 1순위로 나타났다. 그러나 여성계에서는 신사임당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다.
‘여성 인물을 화폐에! 시민연대’의 김경애 대표(동덕여대 도서관장)는 “여성이 화폐에 들어가는 것은 대환영이지만 신사임당은 현모양처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 21세기의 상징 인물로는 다소 무리가 있다는 주장이 많다”고 소개했다.
일부 여성계 인사는 신사임당이 화폐에 들어가면 여성 인물이 안 들어가는 것보다 못하다고 거세게 반발하기도 한다. 여성계에서는 대신 김만덕 유관순 허난설헌 이태영 윤희순 임윤지당 이빙허각 등을 추천하고 있다.
이 가운데 유관순은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적극적 여성상으로 고른 추천을 받고 있다.
김만덕은 조선 영·정조 때 제주도에서 첩, 기생 출신으로 최초의 여자 거상이 된 인물인데 태풍으로 주민이 아사 직전에 이르자 자신의 전 재산을 내놓았다.
제주 출신으로 1976년 김만덕의 일생을 그린 영화 ‘정화’에서 주연을 맡았던 탤런트 고두심 등은 최근 ‘김만덕 기념사업회’를 결성하고 그의 모습을 화폐에 담는 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1969년부터 36년째 ‘신사임당의 날’ 행사를 벌여온 대한주부클럽연합회 김경숙 부장은 “화폐 모델로 여러 여성이 논의되는 것은 좋지만 신사임당은 안 된다는 시각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 부장은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여성만이 모범 여성상은 아니다”며 “신사임당은 학문과 예술에서 남성들의 존경을 받아 왔으며 여성과 어머니의 두 가지 면에서 모두 귀감이 되는 분”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경애 대표는 “신사임당은 가부장적 문화와 어울리는 인물이고 그의 예술활동도 훌륭한 가문 때문에 가능했다는 점에서 보다 진취적인 김만덕이나 유관순이 우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신사임당을 추천하는 사람들은 신사임당이 조선시대와 같은 남성중심 사회에서 남편의 ‘재가(再嫁) 불가’를 해박한 지식으로 주장했으며 그의 작품을 자세히 분석하면 그가 나약한 여성상을 갖고 있다는 것은 편견이라고 말한다.
화폐에 여성이 등장한 것은 서양에서도 오래 전의 일은 아니다.
미국의 경우 현재 지폐 6종의 등장인물이 모두 남성이지만 동전에는 여성의 얼굴이 들어 있다. 미 조폐국은 1970년대 여성운동가 수전 앤서니를 1달러 동전에 새겨 넣었으며 2000년 이 주화를 대체하기 위해 발행한 동전에도 인디언 여성 새커거위아가 들어 있다.
호주에서는 소프라노 넬리 멜바가 100달러 지폐를 장식하고 있고 영국 캐나다 등을 비롯한 영연방 국가들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를 지폐와 동전 등에 담았다.
프랑스의 과학자 마리 퀴리, 이탈리아의 의사이자 몬테소리교육법의 창시자인 마리아 몬테소리, 독일의 곤충화가 마리아 쥐빌라 메리안, 이스라엘의 정치가 골다 메이어 등도 화폐에 등장한다.
일본도 사상 처음으로 올해 사용하기 시작한 5000엔권에 메이지시대 여성소설가 히구치 이치요의 초상을 넣었다. 또 북한의 10원 지폐에는 인민배우 홍영희의 얼굴이 들어 있다.
한국은행에서는 일단 새 화폐가 발행되면 여성 위인을 모델로 ‘모신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현재로선 신사임당이 가장 유력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성주기자 stein3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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