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기업 DNA’가 달라졌다

  • 입력 2004년 6월 3일 17시 39분


리스크 회피, 철저한 기획, 완벽주의, 보고서 문화….

삼성에서 오래 근무하다 은퇴한 이들에게 삼성의 기업문화를 물어보면 나오는 공통된 단어다. 보수적인 냄새가 물씬 풍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삼성의 기업문화가 바뀌었다는 말들이 나오고 있다. 키워드는 ‘스피드’.

삼성은 왜 ‘기업의 DNA(유전자)’라고 불릴 정도로 변화가 어려운 기업문화를 바꾼 걸까.

▽스피드 강조=기업문화 컨설팅회사인 오즈컨설팅 최명돈 대표컨설턴트는 “삼성의 기업문화가 스피드 중시로 바뀐 시점은 반도체 사업을 하면서부터”라고 진단했다.

‘타이밍의 예술’로 불릴 만큼 반도체 사업은 선제적인 투자가 중요하다. 불확실성을 회피하는 삼성의 보수적인 문화와는 어울리지 않는 산업.

이 때문에 이건희 회장은 “신규투자를 결정하는 내부 의사결정 과정에 도장이 200개나 필요한 문화로는 반도체 산업을 할 수 없다”며 스피드 경영을 주문했다. 그는 또 “실패보다는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이 더 문제”라며 기회 선점을 강조했다.

삼성의 문화가 본격적으로 바뀐 것은 외환위기 이후.

윤종용 당시 삼성전자 사장은 ‘자율, 단순함, 스피드’를 내세우며 내부의사 결정 과정을 단순화하고 현장 실무진이 책임을 지고 결정하는 문화를 강조했다. 각종 보고서도 한 장으로 줄이고 책임 회피용 보고서는 아예 올리지도 말라고 지시했다.

“디지털 산업은 생선횟집과 같다. 싱싱한 회만이 좋은 값을 받는다”는 말에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올 초 삼성전자 생활가전총괄 이문용 부사장은 세계 최고의 가전제품과 삼성 제품을 창고에 모아놓고 마케팅, 기획, 연구개발, 디자인실 직원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이들은 한자리에서 모든 제품을 해체하면서 토론을 통해 삼성전자가 해결해야 할 과제를 찾아냈다.

보고서 문화로는 한 달 이상 걸릴 의사 결정이 하루 만에 내려진 것. 스피드 경영이 뿌리내렸음을 알 수 있다.

▽돌연변이는 없다=최 대표컨설턴트는 “삼성의 변화는 과거와의 단절이라기보다 진화적인 변화에 가깝다”고 진단한다.

‘관리의 삼성’이라는 기반 위에서 스피드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재무부문에서는 관리문화가 우선시되고 합리성 추구, 인재 중시, 구조조정본부의 견제 역할 중시 등 전통적인 문화가 상당부분 계승되고 있다.

스피드는 특히 디지털 혁명이 진행 중인 전자업종에서 강조된다. 금융이나 내수업종에 종사하는 삼성 직원 가운데 상당수는 “변화를 크게 느끼지 않는다”고 말한다.

삼성경제연구소 한창수 수석연구원은 “현재의 삼성문화는 고 이병철 회장이 약 50년(1938∼1987년)을 이끌면서 뿌리내린 관리문화와 이건희 회장이 강조하는 전략적 사고와 기회 선점이 결합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병기기자 ey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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