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1970년대를 지나면서 목적지가 뚜렷해졌다. 원로 도시학자는 1966년부터 1980년까지 서울로 몰려든 인구가 하루 평균 약 900명이었던 것으로 계산했다. 이들은 도시에 살았지만 금의환향을 꿈꿨다. 멋쟁이 높은 빌딩 으스대지만 고향으로 돌아가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살겠다고 했다.
▼자본의 논리에 휘둘린 도시개발▼
1960년의 도시인구 비율은 30%가 못 되었다. 그러나 단 30년 만에 이 비율은 75%로 뛴다. 인구의 도시집중 외에 농촌의 도시화도 큰 몫을 했다. 고향이 없어졌다. 목적지가 사라진 것이다. 이제는 강남으로 가야했다.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바람 부는 갈대숲을 지나 아파트로 향했다.
강남은 대한민국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 곳이 되었다. 아파트도 많고 그 아파트의 값도 가장 비싸다. 종로의 아파트들을 모두 모아 팔아도 강남의 특정한 아파트 단지 하나를 못 산다는 계산도 나왔다. 학원도 많고 유흥가도 많다. 공부를 하건 놀건 강남으로 모여야 한다. 강남의 아파트로 주거지를 옮기는 것은 이사가 아니고 입성이었다.
이제 서울의 균형발전을 위해 강북도 강남처럼 개발해야 한다고 한다. 국토의 균형발전을 위해서는 아예 수도를 옮겨야 한다고 한다. 지나간 시대의 화두가 경제발전이었다면 이 시대의 화두는 균형발전인 모양이다.
원칙은 맞다. 대한민국은 골고루 발전해야 한다. 그러나 그 논리가 걱정스러운 것은 강남을 기준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가 불안한 것은 부동산 가치의 상승으로만 의미가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그 개발이 우려되는 것은 결국 과객들로만 붐비는 도시를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평면을 가졌어도 연립주택보다는 아파트 값이 비싸다. 작은 단지보다는 큰 단지 아파트 값이 비싸다. 시장이 형성되어 있어 언제라도 빠져나올 수 있다는 환금성 때문이다. 좋은 환경으로 오래 살 수 있는 동네가 아니고 막내아들의 대학입학과 함께 미련 없이 박차고 나올 수 있는 동네여야 가치가 높다는 사실은 서글프다.
대한민국은 자본공화국이다. 자본의 논리는 이 사회를 재단하는 유일한 도구가 되어 왔다. 돈이 된다면 신주도 팔고 족보도 팔고 비석도 팔아넘겼다. 살던 이의 흔적이 새겨진 문패는 던져버리고 평당 가격과 면적이 적힌 번지수만 붙잡고 있으면 된다는 가치관이 전국을 휩쓸고 있다. 들소와 산양이 아닌 부동산을 사냥감으로 찾아 떠도는 유목민이 되지 않으면 영원히 뒤처진다는 위협이 이 사회에 팽배하다.
새로운 행정수도의 후보지가 발표되는 순간은 집단적인 복권당첨자의 발표 순간으로 여겨졌다. 관심의 중심은 어디에 금이 그어지고, 누가 그 땅을 갖고 있고, 그 땅을 얼마에 팔아넘길 수 있으며, 언제 팔자를 고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비용이 부족하면 광화문 앞의 정부청사와 땅을 팔아서라도 수도를 옮긴다고 한다. 600년 이어온 육조거리를 시골의 무심한 논밭과 부동산 시장의 교환가치로만 비교하는 모습이 섬뜩하다.
실핏줄같이 엮여 온 4대문 안의 도시 조직을 30년 전 채마밭이던 강남처럼 개발해야 한다는 인식도 두렵다. 청계천 복원의 기대가 컸던 만큼 이어지는 개발에 대한 우려도 크다.
▼‘땅팔아 수도이전’ 섬뜩한 발상▼
아쉬운 것은 사라져 가는 이 땅의 역사적 흔적들이고 두려운 것은 종횡무진 힘을 더해가는 자본의 논리다. 부족한 것은 도시에 대한 애정이고 넘치는 것은 도시에 대한 탐욕이다. 주인이 사라지고 주민만 남은 도시, 공동체의식의 자리에 집단적 배타만 가득한 도시, 생활의 바탕이 아니고 투자와 회수의 대상이 되는 도시, 거기서 도시의 미래에 대한 논의는 무기력하기만 할 따름이다. 아름다운 도시는 이토록 멀다.
서현 한양대 교수·건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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