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맥이 가른 재취업=퇴출된 동화은행 직원들의 삶을 첫번째로 가른 것은 인맥이었다. 지인(知人)의 추천으로 제일투자증권에 재취업해 현재 투신법인1법무 부장까지 오른 김경우 부장(40). 그는 “실력 차는 종이 한 장 차였고 결국 인맥이 재취업을 결정했다”며 “인맥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고 주변 사람들에게 항상 성실하게 대하려 노력하고 사람관리에 신경을 쓴다”고 말했다. 김 부장처럼 제일투자증권으로 옮겨간 동화은행 출신은 30여명에 이른다. 퇴출 후 바로 다른 정규직으로 옮겨간 이들은 빚이 있더라도 살던 집을 급히 처분할 필요가 없었다. 안정된 소득이 있어서 이자를 낼 수 있었던 것. 2001년 후반부터 부동산 값이 폭등하면서 빚 상환이나 사업을 하기 위해 아파트를 처분한 사람들과 아파트를 처분하지 않은 사람들간에는 재산의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운도 작용했다. 하지만 한번 찾아온 운을 관리하는 것은 본인의 능력이었다. 퇴출 직원들 사이에 “누군가 주식투자로 큰돈을 번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취재 결과 지점장 출신인 박모씨가 2000년에 벤처투자로 80억원을 번 사실이 확인됐다. 그러나 그는 주식투자를 계속하다 재산을 다 날렸고 이후 주위 사람들과 연락이 끊겼다.
▽철저한 사전준비가 기본=자영업이나 창업에 성공한 사람들은 평소 잘 알던 분야의 사업을 하거나 사전 준비를 철저하게 한 사람들이다. 조사대상인 229명 중 자영업을 시도한 사람은 62명이었고 이 가운데 50명(80.7%)이 실패한 결과에서 보듯 화이트칼라가 갑자기 변신해 자영업이나 회사를 창업해서 성공하는 것은 쉽지 않다.
경기 의정부시에서 중저가 횟집을 열어 성공한 허남씨(50)는 횟집을 해본 경험이 있는 매제에게 주방관리를 맡기고 자신은 인력, 자금, 대외업무와 서비스를 담당했다.
허씨는 “메뉴가 음식점의 생명인데 주방을 모르면 결국 고용한 주방장에게 주인이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며 “창업 전에 유명한 일식집을 돌아다니면서 벤치마킹을 했고 좋은 재료를 어디서 사야 하는지, 손님들이 어떤 부식 메뉴를 좋아하는지 잘 아는 매제에게 주방관리를 맡겼다”고 말했다.
음식점 경영에 노하우가 쌓인 허씨는 강원 춘천시에 갈비집도 열어 성공했다. 갈비집을 열 때도 사전 준비작업을 철저하게 했고 소스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다.
경기 수원시에서 떡집을 개업해 자리를 잡은 이철호씨(43). 그는 개업 전에 한 달간 하루에 5, 6곳의 유명 떡집을 돌아다녔고 두 달간은 한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맛을 내는 비법을 배웠다. 그는 손대중으로 떡을 만들지 않고 ‘쌀 몇g에 소금 몇g’을 넣어야 하는지 끊임없이 연구하고 이를 기록해 오고 있다.
퇴출직원 사이에서 창업 성공 사례로 널리 알려진 중앙신용정보와 전산아웃소싱업체인 H&C테크놀로지도 모두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창업했다.
과거를 잊는 것도 중요하다. 경제적 형편이 나빠진 직원들 중에는 명문대 졸업생이나 대학원 졸업자가 상당수다. 허씨는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겠다고 각오해도 성공이 힘든 것이 현실”이라며 “과거의 나를 버리지 않고서는 현상유지도 어렵다”고 충고했다.
▽인생 역전은 아내한테 달렸다=퇴출 이후 몇 차례 실패를 거듭하다가 재기에 성공한 사람들의 뒤에는 항상 용기를 북돋아주는 아내가 있었다.
서울 강동구 암사동에서 ‘김가네 대박갈비’를 열어 성공한 김재익씨(53·공항로지점 지점장 출신)는 퇴출 후 잇달아 도토리사골탕과 칼국수집 등 3곳의 식당을 냈지만 실패하면서 이혼 직전까지 갔다.
부부는 법원 앞에서 “우리가 왜 이지경까지 왔느냐”고 울면서 화해했다. 그 뒤 부인이 김씨를 적극적으로 도와 네 번째 식당인 돼지갈비집에서 성공했다.
부산 영도지점 지점장 시절 퇴출된 최현민씨(53·외국어대 무역대학원졸)는 두 번째로 2002년 8월에 문을 연 ‘최고집 칼국수’(서울 서초구 서초동)가 이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최씨는 부인의 손을 꼭 잡고 “퇴출 직후 망설임 없이 장사를 하자고 말한 것도 집사람이었고 주방을 맡아 소처럼 일해 온 사람도 집사람이었다”며 “위기에서 더 강해지는 아내가 없었다면 이 정도 살기도 어려웠다”고 말했다.
▽행복의 조건=이번 조사에서 삶의 주관적인 만족도는 소득 및 재산과 대부분 일치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서도 삶의 만족도가 높은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행복의 기준을 바꾼 사람들이다.
지점장 출신으로 퇴출 당시의 절반 정도 임금을 받으면서 지방의 한 중소제조업체에서 일하는 박모씨(55). 그는 “산 정상을 밟아 보지도 못하고 내려오게 됐지만 안전하고 즐겁게 내려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욕심을 버리고 산다”고 말했다.
대구 신천동지점장 재직 중 퇴출당한 이원강씨(55·채권추심업)는 소득은 5분의 1로 줄었지만 부인과 함께 매주 은평천사원에 가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이씨는 “나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겸손을 배웠다”며 “김치 안주와 막걸리 한잔에도 감사할 수 있는 작은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아빠는 실업자" 우는 딸 보고 재기 결심▼
1998년 10월, 초등학교 2학년 딸이 울면서 학교에서 돌아왔다. “부모님 직업 조사에서 아빠가 실업자인 사람이 두 명뿐”이라며 눈물을 쏟았다. 원용주씨(48·전 동화은행 길동역지점 과장)는 중국에서 버섯을 수입하는 매형에게 당장 전화를 걸어 “딸에게 줄 명함을 하나 파 달라”고 말했다. 매형은 다음 날 명함을 건네며 아예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다.
그날 저녁 원씨는 딸에게 “아버지도 직업이 있다”며 명함을 건넸다. ‘다시는 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하겠다’고 결심했다.
무역일이 어느 정도 손에 익자 그는 홀로 중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아파트를 팔아 사업자금을 삼았고 아내와 두 딸은 처갓집 2층으로 보냈다. 가족의 생계는 아내가 책임지기로 했다.
생활비를 한 푼이라도 줄이려고 중국인 빈민가로 들어갔다. 빈민가 생활은 빠르게 중국문화와 중국어를 배울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안경렌즈를 구입해 한국에 내다파는 ‘보따리 장사’가 잘되면서 자신감도 커져갔다. 그러나 2000년 여름 중국 공안이 ‘밀수업자’를 단속한다며 들이닥쳤고 전 재산을 압수당했다. 빈민가 공동주택의 전기요금을 못 낼 정도로 절망적인 상태가 됐다. 한 달간 점심을 거른 돈으로 겨우 전기요금을 냈다. 2001년 11월. 심신이 지친 원씨는 잠시 귀국했다. 아내는 공항에 마중도 나오지 않았다. 집에 도착해보니 텅 비어 있었다. 2층 베란다에서 5시간을 서서 아내를 기다리면서 분노가 치솟았다. ‘돈 못 번다고 남편을 사람 취급도 안 하는구나.’
집에서 60m가량 떨어진 골목 어귀에 아내의 모습이 나타났다. 미친 듯이 뛰어오고 있었다. 문득 “요즘 공모주 청약을 위해 하루에 증권사를 열군데 이상 돌아다닌다”는 아내의 편지가 떠올랐다. 그동안 나만 고생한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집에 들어선 아내에게 “당신 너무 힘들지”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아내는 “이제야 알겠느냐”며 눈물을 터뜨렸다.
원씨는 중국으로 다시 건너가 고생 끝에 베이징(北京) 중심가에서 종업원 70명의 고급 갈비집 ‘화춘옥’을 공동 운영하는 사장이 됐다. 중국에서 개인이 운영하는 가장 성공한 한식당이 됐다. 원씨의 연소득도 은행원 시절보다 5배 이상 뛰었다.
2002년 초 아내와 두 딸도 중국으로 불러들였다. 두 딸은 중국인 학교에서 우등생이 됐다. 찬바람 속에 증권사를 돌아다니던 아내 최화자씨(43)는 자전거를 타고 중국어 학원에 다닌다.
최씨는 “가족이 매일 모이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며 “계속 이렇게만 산다면 더 바랄 게 없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이병기기자 eye@donga.com
조인직기자 cij1999@donga.com
김상훈기자 sanhkim@donga.com
이철용기자 lc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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