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출이후…무너진 중산층]<5·끝>국가는 어디에도 없었다

  • 입력 2004년 9월 9일 18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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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출 이후 동화은행 직원 중 조사 대상인 229명이 6년간 걸어온 길을 추적해보면 한국 사회에서 실직자들이 제2의 삶을 모색하면서 국가로부터 받는 도움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조사 대상 중 상당수가 한국의 현실에 절망하고 있다. “돈만 모이면 한국을 떠나겠다”는 사람도 많다. 정부 통계나 각종 조사 자료는 동화은행 퇴출 직원들이 걸어온 길이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님을 보여준다.》

노동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1997년 10월 이후 2002년 10월까지 은행, 보험, 증권 등 금융 산업에서 이직한 사람은 42만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강제 퇴출된 직원은 18만명.

42만명 중 대학졸업자의 57.5%가 정규직(고용보험 사업장)에 재취업하는 데 실패했다. 42만명 전체의 탈락률은 64.7%. 이 통계에는 자발적으로 회사를 그만둔 사람이 절반 이상 포함돼 있음을 감안하면 강제로 회사를 떠난 사람들의 탈락률은 더 높다.

취재팀의 조사로는 동화은행 직원들의 정규직 탈락률은 68.6%다. 3명 중 1명만이 안정된 직장으로 재취업하는 데 성공한 것.

동화은행 퇴출 직원들의 이야기는 외환위기 이후 강제 퇴출된 수십만명의 화이트칼라의 삶의 기록이다.

○취약한 재취업 교육과 고용 시스템

조사 대상이 됐던 동화은행 퇴직자 229명 중 ‘재취업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고 대답한 사람은 182명(79.5%)이었다. 정부가 제공한 재교육이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한 것.

교육을 받은 46명 중에서도 32명(69.6%)이 ‘도움이 안됐다’고 대답했다. ‘교육을 통해 취업했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정부가 제공한 교육은 화이트칼라의 재취업을 돕기에는 너무 엉성했고 실효성이 없었다.

테헤란로지점 행원으로 있다가 퇴출된 이모씨(34)는 “해외취업 희망자를 위한 영어 교육 프로그램에 한 달가량 참여했지만 인사말만 가지고 한 달 내내 반복 교육하는 것을 보고 실망했다”고 말했다.

정보기술(IT) 인력이 부족하다며 실직자에 대한 대대적인 전산교육이 실시됐지만 ‘워드 프로세스’나 ‘윈도’ ‘엑셀’을 가르치는 수준이었다. 업계가 요구했던 IT인력은 고급 소프트웨어를 만들 수 있는 엔지니어였다. 한두 달 전산교육을 통해 습득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었다.

노동연구원 안주엽 연구원은 “한국의 재취업 교육은 대부분 1개월 ‘속성 과정’이라 화이트칼라의 재취업에 기여하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며 “1∼3년가량 시키는 선진국 수준은 안 되더라도 최소한 6개월은 돼야 교육을 통한 진로 변경이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예고된 자영업의 실패

외환위기 이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정부는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 벤처붐과 ‘자영업 창업’ 붐을 일으켰고 재취업에 어려움을 겪은 많은 실직자들이 자영업자로 변신했다.

통계청 경제활동 인구조사에 따르면 1995년 752만명이던 자영업자수가 1999년 763만명, 2002년 798만명으로 크게 늘었다.

이런 상승세는 작년부터 꺾였다. 한 해 동안 25만명이 가게 문을 닫아 774만명으로 줄었다. 수십만명의 실직자들이 사전 준비 없이 식당, PC방, 미용실, 노래방 등 손쉽게 창업할 수 있는 아이템을 골라 가게를 열었다가 실패한 것. 이 과정에서 퇴직금을 날린 사람들이 급격하게 빈곤층으로 추락했다.

한국의 취업자 중 자영업자 비율은 28.9%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내에서 아직도 가장 높다. 미국과 일본이 각각 7.3%, 5.9%며 대부분 10% 미만이다. 노동연구원 금재호 연구원은 “경기악화와 업종간 경쟁 심화로 폐업 점포 수가 급격하게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가족의 해체’를 막는 프로그램 필요

실직은 필연적으로 가정에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준다. 그러나 동화은행 퇴출자의 사례에서 보듯 이들이 처한 문제를 상담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나 국가 기관이 없었다.

동화은행 퇴직자 229명 중 이혼위기를 겪은 가정은 72.1%. 상당수 부부가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로 별거나 이혼을 하고 자식들은 가출, 학업 포기 등 빗나간 길을 걸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문제를 전문가에게 상담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곽배희(郭培姬) 한국가정법률상담소장은 “가정이 해체돼 빈곤층으로 전락해야만 국가는 공공부조를 통해 이들을 돕는다”며 “전문가의 상담을 통해 가족해체를 막는 프로그램이 도입되면 국가의 경제적 부담도 크게 줄어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새로운 대안은 없나

퇴출된 직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제2의 삶을 모색할 수 있는 준비기간이다. 미국 독일 프랑스 등은 80년대부터, 일본은 90년대부터 ‘예비 해고자’에 대한 전직(轉職)을 돕는 ‘아웃플레이스먼트(outplacement)’ 시스템을 도입했다.

선진국의 기업들은 퇴직 대상자를 상대로 기업이 재취업 자리를 알아봐 주는 것은 물론 재취업에 필요한 기술 및 진로 교육을 제공한다. 국내에서는 90년대 후반부터 삼성전자 포스코 등 일부 기업만 도입한 상태다.

전문가들은 효율적 예산 집행을 강조한다. 김동원(金東元)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소득수준이 1만달러에 머문 한국이 선진국 수준의 사회안전망을 갖추기는 아직 어렵다”면서 “그러나 예산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려는 노력만 기울여도 수많은 실직자들의 삶을 개선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믿을 것은 가족뿐"…27% 주위도움 받아▼

믿을 것은 가족뿐이었다.

조사 대상인 동화은행 퇴출 직원 229명 가운데 지난 6년간 주위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은 사람은 62명(27.0%). 이들 중 부모(32명), 형제(14명), 처가(8명), 친척(3명) 자식(1명) 등 일가친척들로부터 도움을 받은 사람이 총 58명이다.

23명의 부모가 급한 빚에 쫓기는 자식에게 2000만원에서 많게는 3억원까지 현금을 지원해 줘 이들이 신용불량자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줬다.

자식을 위해 희생한 부모도 있다. 이모씨(42·자영업)의 어머니는 이씨가 퇴출 직후 동화은행에서 빌린 전세보증금을 갚지 못해 위기에 몰리자 다른 은행에서 2000만원을 빌려 이씨에게 건네줬다. 빌린 돈을 갚지 못한 어머니는 신용불량자가 됐다.

장모씨(33)의 아버지는 빚에 몰린 아들에게 집을 담보로 3000만원을 건네줬다. 재혼한 부인은 “전처 자식에게 상의도 없이 돈을 줬다”고 반발했고 끝내 갈라섰다.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 다른 방법으로 자식을 도와준 부모도 9명. 이들은 자식의 가족을 집으로 불러들여 함께 살거나 시골에서 농사지은 쌀을 보내는 등 간접적으로 자식들을 도왔다.

친구나 동료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아 위기 상황을 벗어난 사람은 4명. 큰 돈은 아니지만 고교동창이 모아준 돈이나 정규직으로 옮겨간 직장 선배가 빌려준 돈은 극한 상황에 처해 있던 이들에게는 큰 도움이 됐다.

주위의 도움이 재기를 보장해주지는 못했다. 빈곤층으로 전락한 45명 중 17명이 3000만원에서 많게는 3억원에 이르는 돈을 지원받았다. 자신의 퇴직금을 털어 시작한 가게가 실패하자 주위에서 도움을 받거나 돈을 빌려 다시 재기를 노렸지만 좌절한 사례가 대부분이다.

배신감을 느낀 사람들도 상당수였다.

박모씨(47·채권추심업)는 은행 재직 시절 아내 몰래 전세금을 담보로 돈을 빌려 친구를 돕다 이혼 위기까지 겪었다. 그러나 박씨가 퇴출 뒤 도움을 요청했지만 친구는 자신도 어렵다며 외면했다. 박씨는 “가장 절친한 친구라고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을 당한 뒤부터는 사람을 믿지 않게 됐다”고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특별취재팀▼

이병기기자 eye@donga.com

조인직기자 cij1999@donga.com

김상훈기자 sanhkim@donga.com

이철용기자 lcy@donga.com

★이 기사의 취재에는 6월 28일부터 8월 27일까지 본보 대학생 인턴기자로 활동했던 김수연(고려대 중문과 4년) 김현진(서울대 경제학과 3년) 신지영(연세대 신방과 4년) 양승은(고려대 영문과 4년) 유재인(이화여대 광고홍보학과 4년) 유현주(서강대 중문과 4년) 이민영(고려대 불문과 3년) 정경수(중앙대 경영학과 4년) 정욱재씨(펜실베이니아대 시스템공학과 3년)도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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