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동구에 있는 A은행 지점은 최근 만기가 된 선반업체에 대출금 5000만원의 만기를 1년 연장해줬다.
“불경기가 몇 달 더 이어지면 부실채권이 될 것 같다. 하지만 꼬박꼬박 대출금을 갚던 15년 고객이 눈물로 하소연하니 믿어볼 수밖에 없다.”(지점장 Y씨)
주류도매업체가 빌린 시설자금 3억원도 운영자금 대출로 전환해줬다. 원리금을 5년 동안 나눠받을 것을 1∼3년 동안 이자만 받은 뒤 원금을 회수하기로 한 것.
이런 대출조건 변경은 기존 고객에 국한된다.
Y지점장은 “담보나 보증서 없이 나가는 신규 신용대출은 월 평균 30여건의 기업대출 가운데 1, 2건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서울 서초구에서 네트워크 장비업체를 운영하는 C사장은 “발주서를 갖고 한 달 동안 은행 5곳을 돌아다녔지만 헛수고였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달 개발자금 8000만원을 월 10%의 사채로 빌려 충당했다.
Y지점장은 “기존 여신은 당장 부도날 지경이 아니면 연장된다”며 “중소기업 대출의 핵심 문제는 신규 여신을 어떻게 취급하느냐”라고 밝혔다.
재정경제부는 22일 어떤 경우에 중소기업 대출을 회수하거나 한도를 줄일지를 이달 안에 구체적으로 명문화하라고 은행들을 다그쳤다. 기존 대출을 가급적 회수하지 말라는 주문이다.
은행들은 정부의 상황 인식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23일 조만간 정부 요구에 맞춰 표준 대출약관을 개정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당좌대출 등 초단기자금 대출에 대해 이달 초부터 대출약정서에 한도 축소 및 회수 요건을 명시했다”면서 “만기 1∼3년인 운영자금 대출에도 이를 적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기존 대출약정서는 대출한도 축소 및 회수 사유를 ‘은행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로 해놓았다.
앞으로는 △신용등급 2단계 이상 하락 △경영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소송 발생 △거액의 세금 체납 등 구체적인 사유를 명시하겠다는 것.
한 은행 관계자는 “대기업은 은행의 돈을 안 쓰고 가계대출은 부실화 우려로 더 늘리기 어려워 어차피 중기 대출로 돈을 굴려야 하는 상황”이라며 “1980년대식 창구 지도는 그만 두고 경기를 살려 은행이 안심하고 중기 대출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고 정부에 주문했다.
이철용기자 lcy@donga.com
김승진기자 sarafina@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