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2004년. 극심한 내수시장 침체로 서민들의 한숨 소리가 깊어간 한 해였지만 묵묵히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해 2004년을 ‘희망의 해’로 만든 이들이 있다.
북한 출신이란 멸시 속에서 사업을 한답시고 정부로부터 받은 정착금을 날리기도 했지만 끈질긴 노력 끝에 올해 첫 흑자로 돌아선 탈북자회사 ㈜백두식품 직원들이 그들이다.
24일 오전 경기 김포시 통진읍의 조그만 식품공장.
차가운 바람이 불었지만 식품상자를 나르는 이 회사 직원들의 목덜미는 땀방울로 축축했다. “날래 서두르라”는 낯선 평양 사투리엔 어딘지 모르게 즐거움이 묻어났다.
지게차를 운전하던 신동혁 씨(39)는 “회사를 열고 처음으로 적자를 면했는데 이 정도 어려움은 일도 아니다”면서 “1년 내내 요즘만 같다면 콧노래도 나올 판”이라고 말했다.
백두식품은 신 씨를 포함해 전영일(38) 이송남 씨(46) 등 탈북자 7명이 모여 만든 회사. 1995∼1997년 탈북한 이들은 한 귀순자 모임에서 알게 된 뒤 “우리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 한번 해보자”며 의기투합해 2000년 9월경 회사를 차렸다.
특별한 전문기술도 없었던 이들이 생각해낸 사업 아이템은 느릅나무 잎으로 만든 식품. 북한에서 명절 때 귀한 손님이 찾아오면 내놓는 느릅나무 잎가루로 면이나 부침가루 등 먹을거리를 만들어 식당이나 대형마켓에 납품을 시작했다.
하지만 비싼 재료를 쓰다보니 다른 제품보다 2, 3배나 비싸 처음부터 잘 팔릴 리가 없었다. “탈북자가 무슨 사업이냐”는 비아냥거림은 기본이고, 제품 자체의 질에 의심을 품는 이들도 많았다.
창립 때부터 이들을 지켜봐온 사회봉사단체 ‘사랑의 전화’의 엄영수 대리(33)는 “처음엔 은행도 이용할 줄 모르던 이들이라 홍보는커녕 사업이 뭔지도 몰랐다”면서 “지난해까지 월급봉투 한번 떳떳이 집에 내놓은 사람이 없었다”고 말했다.
시련은 지난해 절정에 달했다. 어떻게든 활로를 뚫기 위해 영입한 남한 출신 전무가 회사 자금을 횡령해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게다가 같이 시작했던 탈북자 중 한 명이 다른 이들 몰래 다른 업체에 운영권을 넘기려다 법적 공방까지 치러야 했다.
“다행히 승소하긴 했지만 동지라고 믿었던 사람과 법정에 섰을 때의 심정은 정말 참담했죠. ‘다 같이 63빌딩에 올라가 뛰어내리자’며 목 놓아 운적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릴 버티게 한 것은 우린 직위도 뭣도 없는 ‘하나의 공동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오전 7시에 출근해 오후 10시에 퇴근. 쉬는 날도 반납하고 일에 매달렸다. 작은 일 하나도 함께 논의해 결정하는 이들의 ‘공동체론’에 남한 직원들도 감복했다. 창사 이래 한번도 적자를 면치 못했던 회사는 올해 매출 12억 원을 기록하며 드디어 흑자를 맛봤다.
윤성철 홍보이사(39)는 “힘든 세월이었지만 ‘함께 최선을 다하고 신의를 지키면 누구든 성공할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이뤄낸 것이 가장 기쁘다”면서 “2005년엔 제품 연구개발에 계속 투자해 ‘건강에 좋은 식품 팔아 돈 버는 회사’로 자리 잡겠다”고 말했다.
김포=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