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은행 인수에 실패했지만 국내 금융시장 진출 의지가 높은 영국계 HSBC도 마지막 남은 매물인 외환은행 인수에 전력투구할 전망이다.
결국 세계 주요 은행들이 한국 금융시장에 참여할 가능성이 커진 셈이다.
특히 이번 매각으로 뉴브리지캐피탈은 5년 만에 1조1500억 원가량의 매각 차익을 얻은 반면 정부는 5조3000억 원의 공적자금 손실을 보게 돼 헐값 매각 논란을 불러올 전망이다.
▽헐값 매각이었나,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나=정부가 제일은행에 투입한 공적자금은 17조6532억 원에 달한다. 정부는 자산 매각과 유상감자(減資) 등을 통해 작년 말 까지 약 10조3000억 원을 회수했다. 이번에 SCB로부터 받을 매각대금 1조7000억 원 등을 감안해도 막대한 공적자금 손실이 불가피하다.
뉴브리지는 한국 세무당국에 막대한 차익에 대한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을 전망이다. 뉴브리지 측의 인수계약 주체가 말레이시아에 설립된 페이퍼컴퍼니 ‘KFB 뉴브리지 홀딩스 리미티드’로 돼 있기 때문.
한국과 말레이시아는 조세협약을 체결해 이중과세를 금지하고 있으며 외국인의 유가증권 거래차익은 대부분 ‘본점 소재지 과세원칙’을 따르고 있다.
1999년 말에도 제일은행 매각은 헐값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정부가 부실채권을 모두 인수하고 향후 2년간 발생하는 부실까지 떠맡기로 하면서 5000억 원에 넘긴 것은 뉴브리지에 지나치게 유리한 조건이었다는 것.
LG경제연구원의 조영무(曺永武) 연구원은 “제일은행에 쏟아 부은 국민부담을 감안할 때 헐값 매각에 대해선 비판의 여지가 있다”며 “하지만 외환위기 당시 그런 식으로라도 은행을 팔지 않았으면 과연 외환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겠느냐는 시각도 있다”고 말했다.
▽은행 대전(大戰) 막 올랐다=한국씨티에 이어 SCB가 전국적인 영업을 하는 시중은행 대열에 합류하면서 ‘은행전쟁’은 더 치열해질 전망이다.
우리금융지주 금융연구소 유용주(劉容周) 부장은 “한국의 금융시장 규모에서 ‘빅 6’가 존재할 수는 없다”며 “올해는 이 중 누가 선두권(3위권)에 진입하는지를 가리는 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유 부장은 “선두권의 의미에는 자산 규모 등 양적 지표뿐 아니라 질적인 면도 포함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글로벌 은행과의 경쟁에 노출된 토종은행들은 수익성과 리스크 관리 능력 등을 글로벌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관건. 한국씨티와 SCB(제일은행 인수 후)의 총자산 규모는 시중은행 7개(조흥 신한 합병할 경우) 중 6위와 7위이지만 리스크 관리 능력, 낮은 자금조달 비용, 상품 구성 능력, 수익성 등 질적인 면에서는 국내 은행보다 경쟁력이 높다.
신상훈(申相勳) 신한은행장은 이달 초 신년사에서 “많은 부분에서 세계적인 잣대를 들이대면 격차가 크다”며 “올해는 도약할 것인가, 추락할 것인가를 가르는 분수령이 될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글로벌은행, 한국시장에서 한판 승부=금융전문가들은 씨티그룹에 이은 SCB의 국내 은행 인수는 뉴브리지 등 투기자본의 은행 인수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지적한다.
금융업을 본업으로 하는 금융전문 그룹이 본격 진입하면서 국내에서 이들의 영업 경쟁도 가열되리라는 것.
한국씨티와 SCB는 우선 규모 확장보다는 수익성 위주의 영업에 치중할 것으로 보인다.
하영구(河永求) 한국씨티은행장은 최근 “시장점유율을 꼭 자산규모로만 따지는 것은 아니다”며 수익성 면에서의 점유율 높이기에 나설 것임을 시사한 바 있다. SCB는 모기지론 개인신용대출 등 소매금융 시장을 적극 공략한다는 방침.
제일은행 인수에 실패한 HSBC는 올 11월부터 본격화될 외환은행 인수전에 뛰어들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전통적으로 강세였던 아시아 시장에서 최근 씨티그룹에 눈에 띄게 추격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시아에서 3번째로 경제 규모가 큰 한국 시장을 놓칠 수 없기 때문. 또 HSBC는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에 치우친 영업을 동북아시아로 확장한다는 아시아 전략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강운 기자 kwoon90@donga.com
김승진 기자 sarafina@donga.com
▼스탠다드차타드 은행은▼
영국런던에 본부를 두고 있는 영국계 은행으로 1853년 설립됐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 남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영국, 미국 등 세계 50여 개 나라에 500여 개 지점과 3만여 명의 직원을 두고 있다.
현재 홍콩과 런던 주식시장에 상장돼 있으며 아시아 상장은행 가운데 시가총액 기준으로 3위에 랭크돼 있다.
2004년 6월 기준으로 본사의 자산규모는 1200억 달러(약 126조1320억 원)이며 같은 해 15억4200만 달러(약 1조6208억 원·9월 말 현재)의 영업이익을 냈다.
국내에는 19세기 후반에 들어와 1910년 일제 강점과 함께 영업을 중지했다가 6·25전쟁 후 유럽계 은행 가운데 처음으로 1968년 지점을 개설했다. 2004년 10월에는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프라이빗뱅킹(PB) 센터를 개설한 뒤 본격적인 한국시장 진출을 노리고 있다. 현재 직원 수는 200여 명.
지난해 6월 말 현재 서울지점의 총 자산은 5조1772억 원으로 국내시장 점유율은 미미한 수준이었지만 제일은행을 인수하면 국내 자산이 52조여 원으로 늘어나 6, 7위권으로 껑충 뛰어오른다. 업계에서는 SCB가 소매금융에 강한 제일은행 인수를 계기로 글로벌 네트워크와 선진금융 노하우를 접목해 위협적인 존재로 떠오를 가능성이 높다고 점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에는 이렇다 할 영업망을 갖추지 못해 이 지역에서 적극적으로 확장정책을 펴고 있다. 이번 제일은행 인수전(戰)에서 적지 않은 ‘베팅’을 감행하면서 적극적으로 뛰어든 것은 아시아 지역 영업망 확대가 절박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정경준 기자 news9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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