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클럽의 생태계=팬클럽 자체는 하나의 거대한 생태계다. 벤처기업처럼 빠르게 생겨나 순식간에 조직이 커지거나 소멸된다.
5인조 가수 동방신기의 팬클럽은 다음커뮤니케이션 카페에 2만여 개, 네이버에 5000여 개가 있다. 작은 팬 카페의 회원은 20여 명이지만 최대 규모인 ‘유애루비’ 회원은 90만 명에 이른다. 다음의 팬 카페 수는 2000년 300여 개에서 4년 만에 10만8000여 개로 폭증했다.
팬 카페는 열정적이며 헌신적인 운영진을 중심으로 정교한 조직체계를 갖추고 있다. 가수 ‘비’의 팬 카페 ‘레인 쉐도우’의 운영자 홍모 양(경기 의정부 호원중 2년·15)은 “각 카페에는 기업이사회 같은 운영자 모임과 총무, 포토숍, 영상, 게시판 등을 맡는 여러 명의 ‘지기’로 구성돼 있다”고 설명한다.
회원들은 능력과 헌신도에 따라 보상받는다. 운영자들은 카페에 열성적으로 참여한 회원 중 지기를 선발하고 일정기간 후 성과에 따라 교체한다.
같은 가수의 팬이면서도 팬 카페끼리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인터넷을 통해 치열한 정보전과 홍보전, 회원 수 늘리기 경쟁을 한다. 업무 속도는 특수부대를 연상시킬 만큼 민첩하다.
몸집을 늘리기 위해 팬 카페끼리 ‘합병’도 한다. 2003년 11월 가수 비의 팬클럽 ‘비광파’(비에 미친 파)와 ‘비녀 시스터즈’(비의 여자들)는 조직을 합쳐 ‘레인 쉐도우’로 거듭났다.
양쪽이 ‘온라인에 강한 비광파와 오프라인에 강한 비녀 시스터즈가 합병될 경우 시너지 효과가 있다’는 데 의견일치를 본 것. 1만 명의 회원들에게 단체메일을 보내 투표를 거쳐 합병 안을 통과시키는 데는 일주일밖에 안 걸렸다.
▽스타는 ‘☆’이 아니다=지난달 29일 서울올림픽경기장에서 열린 가수 ‘비’의 콘서트. 줄을 선 팬들 사이로 명함을 돌리는 소녀들이 눈에 띄었다. 명함에는 자신들이 속한 팬 카페의 이름과 카페 가입을 권유하는 글이 써 있다.
서울 하계중 3년 이모 양(16)은 “회원들이 30만 원을 모아 팬 카페 명함 3000장을 찍었다”며 “회원을 늘려 영향력을 키우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공연장에는 가수 사진이나 이름 외에 팬클럽 이름이 적힌 플래카드나 피켓이 많다. 익명의 팬으로서 동경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표현하려는 것.
이제 팬클럽은 스타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권력’을 가졌다. 지난해 11월 동방신기의 해체설이 나돌자 팬들이 “회원 90만 명이 1인당 2만5000원씩을 모아 기획사에 위약금 200억 원을 지급, 해체를 막자”고 나섰다. 2001년 기획사 사이더스는 가수 ‘god’ 멤버인 박준형을 퇴출시키려 했지만 260개 팬 카페 회원들이 들고 일어나 이를 취소시켰다. 특정 팬클럽들은 가수의 앨범 타이틀곡, 의상, 무대효과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한다.
한국방송통신대 교육학과 정민승 교수는 “인터넷과 10대의 주체성, 표현 및 참여욕구가 결합되면서 하늘에 있던 스타가 팬들의 옆으로 내려왔다”고 말했다.
▽팬클럽에서 인생을 배운다=10대들은 팬클럽 활동을 하며 새 친구를 사귀고 조직생활과 경쟁원리를 배운다.
2000년 초 H.O.T. 팬클럽 회원이었던 임연정 씨(23·이화여대 정보통신학과 3년)는 “타인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그 관계유지를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를 팬클럽에서 많이 배웠다”고 회상했다.
팬클럽은 이제 스타와도 독립돼 자체적인 생명력을 갖고 있다. 스타와 상관없는 친목 모임이 유지된다. 서울 한서고 2년 이모 양(17)은 “고3이 되면서 팬클럽 활동은 소홀해지겠지만 팬클럽 활동을 통해 만난 친구들과의 관계는 끊을 수 없다”고 말했다.특별취재팀
▼게임은 ‘제2의 학교생활’▼
쌍용차 홍보팀 정무영 팀장(45)은 1일 밤늦게 게임을 하는 중학교 1학년 아들(14)에게 “게임 좀 그만하라”고 꾸짖었다. 아들은 “직접 한번 보세요”라고 대꾸했다. 아들이 보여 준 온라인 골프게임 ‘팡야’의 화면에는 같은 반 친구 31명 중 20명이 접속해 있었다.
“마치 학급이 그대로 온라인으로 옮겨 온 것 같더군요. 게임을 못 하게 하면 친구들과 어울리는 데 문제가 생기겠다는 생각이 들어 ‘적당히 하라’고 물러섰습니다.”
게임은 이제 10대에게 학교생활의 연장이다. 이들은 온라인 게임 속에서 학교 친구들을 만나 함께 게임을 즐긴다. 이들은 게임 속에서 채팅을 하며 수학문제도 같이 풀고 영어숙제도 함께한다.
▽한국은 게임 공화국=서울 S초등학교 장모 교사(56)는 몇 년 전부터 일년 내내 게임 속에서 겪은 일만 일기로 써서 제출하는 학생들로 골머리를 썩고 있다. 이런 학생들은 동화를 읽고 독후감을 써 오라는 숙제에도 ‘나 같으면 청룡언월도로 그놈을 먼저 처단했을 텐데…’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등 24시간 게임 생각을 한다.
청소년보호위원회의 조사결과 한국의 10대는 온라인 게임에 하루 평균 1시간 46분을 쓴다. 전체 응답자의 86.2%가 온라인 게임을 해 봤으며 이 가운데 25.4%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온라인 게임을 한다. 게임을 즐기는 10대의 70%인 남학생들은 평균 시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게임에 투자하는 셈이다.
정보문화진흥원 인터넷중독센터 이수진 연구원은 “청소년이 대부분의 여가시간을 게임에 쓰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고 말했다.
▽게임밖에 할 게 없다=한국의 10대는 초등학교 때부터 온갖 과외에 시달린다. 이들이 자기 시간을 갖는 것은 해가 진 이후. 이 시간에 마땅하게 할 놀이는 게임뿐이다. 이들에게 사이버공간은 학교 운동장이며 골목길이며 놀이터다. 재수생 박모 씨(19)는 “중고교 시절에는 온라인 게임을 안 하면 친구들과의 ‘사회생활’이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더욱이 온라인 게임은 할수록 빠져드는 구조를 갖고 있다. 접속할 때마다 새로운 등장인물과 이야기가 나타나고 레벨이 높아질수록 더 높은 레벨로 올라가고 싶은 강박관념이 생긴다. 또 게임 속 ‘고수’는 게임에서 권력과 존경을 얻게 돼 현실에서 경험하기 어려운 성취감도 누릴 수 있다.
경기 안양시 평촌 귀인중 2년 김모 군(15)은 “온라인 게임에서는 남을 도와주고 뿌듯함을 느끼거나 배신당해 가슴 아플 수도 있다”며 “현실에서 하기 힘든 다양한 경험이 가장 큰 재미”라고 말했다.
▽거실로 나온 컴퓨터=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게임을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다르다. 청소년보호위원회 임선희 위원장은 “한국 청소년은 어릴 때부터 게임을 너무 많이 해 운동량이 부족하고 몸으로 부대끼며 겪는 체험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반면 중앙대 콘텐츠연구소 위정훈 교수(경영학)는 “학교와 학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10대가 친구를 만나고 재미있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은 게임 속 세계뿐”이라고 말했다. 운동량 부족이나 체험결핍의 원인은 게임이 아니라 지나친 교육열이라는 것.
전문가들도 뚜렷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부모들은 자녀들과 타협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
작년 말 청소년보호위원회의 조사결과 현재 가정에서 컴퓨터가 있는 장소는 거실(31.2%)과 부모 방(28.7%)이 가장 많았다. 자녀 방에 컴퓨터를 두는 가정은 23.5%에 그쳤다. 상당수 부모가 자녀의 일탈을 막기 위해 컴퓨터의 위치를 감시하기 쉬운 곳으로 옮기고 있음을 보여 준다.
▼특별취재팀▼
이병기 기자(팀장)eye@donga.com
이정은 기자lightee@donga.com
김상훈 기자sanh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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