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씨는 “포장을 벗길 때에도 조심해서 제품을 다루고 흠집이 생기지 않게 제품을 아껴 사용하면 되팔 때 좋은 가격을 받을 수 있다”며 “결과적으로 지금 사용하는 카메라를 할부로 구입한 것과 비슷한 가격에 훨씬 많은 최신 카메라를 사용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부자가 아니라도 새 제품을 쓸 수 있다=정보기술(IT) 분야에서 윤 씨와 같은 소비 행태를 가진 소비자가 늘고 있다. 대부분이 IT 관련 기기에 관심이 많은 25∼35세의 젊은 남성 직장인.
이들은 늘 더 좋은 제품으로 기기를 ‘업그레이드’한다는 의미에서 ‘업글러’로 불리거나 신제품 마니아인 ‘얼리어답터’와 비교해 ‘헝그리어답터’라고 불린다. 기존의 얼리어답터가 신제품을 구입하는 데 비해 이들은 물건을 잠시 사용한 후 되팔고 그 돈으로 다시 중고 물건을 사기 때문에 생겨난 표현이다.
인터넷 경매업체 옥션에 따르면 ‘컴퓨터’와 ‘가전’ 카테고리에서 IT 관련 기기를 사고 3개월 내에 다시 판매한 개인 회원의 수는 1만8000여 명. 이들 대부분이 헝그리어답터로 추정된다.
중고제품 거래 결제 대행 업체인 엑스팟의 최재복 과장은 “통계에 잡히지 않는 개인 사이의 현금 거래까지 포함하면 연간 500억 원가량의 거래가 이뤄지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새로운 소비 행태가 가져온 변화=헝그리어답터 덕분에 중고품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다. 기업들도 이들의 존재를 인식해 마케팅에 활용하고 있다.
MP3플레이어 제조업체 레인콤의 박영래 과장은 “고객의 요구로 인터넷 홈페이지에 중고장터 운영을 회사가 맡아 결제 대행 서비스까지 제공한다”고 말했다.
헝그리어답터는 용산전자상가 등의 유통 방식도 변화시켰다. 헝그리어답터가 매장별 가격 정보 등을 인터넷 동호회와 중고장터 등에 올리면 가장 저렴한 업체 수준의 가격을 제시하지 못한 업체는 재고 처리도 제대로 하기 어려워진다. 이 때문에 용산상가 상인들은 오프라인 매장에선 값이 떨어지기 전의 ‘최신 제품’만 판매하고 있다.
▽충동구매인가, 합리적 소비인가=IT 기기를 끊임없이 사고파는 헝그리어답터는 한국에만 있다.
옥션의 홍윤희 과장은 “미국의 중고 거래 사이트 이베이에선 희귀 수집품이 중고 거래의 대상이지만 한국에서는 현재 시장에서 팔리는 제품이 주로 거래되는 게 차이”라고 전했다.
짧은 제품 교체 주기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허경옥 성신여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헝그리어답터의 소비 행태에 대해 “품질과 가격으로 제품을 구입하기보다 제품 소비를 통해 스스로가 ‘IT 분야의 선도자’라는 만족을 얻기 위한 소비로 보인다”며 “제품 구입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하기 때문에 자칫 ‘구매 중독’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 이를 가능성도 있다”고 우려했다.
나종연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IT 기기에 가치를 부여해 준 소비자 덕분에 IT 산업이 발달한 셈”이라며 “이들은 기업이 주목하지 않는 저(低)마진 제품을 팔고 사며 제품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등 산업 전체에 도움이 되는 소비 패턴을 보이기도 한다”고 말했다.
김상훈 기자 sanh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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