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스탁, 조르조 사포리티, 마리오 보타, 다니엘 리베스킨트…. 언뜻 이름만 보면 의류 디자이너 같은 이들은 최근 서울시내 건축물의 내외부를 설계하며 국내에 알려진 세계적 건축가나 산업 디자이너들이다. 이들의 활동영역은 이제 국내 고급빌라나 단독주택으로 확대되고 있다. 집이 점점 고급화, 브랜드화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고급 의류도 일반 기성복보다는 ‘디자이너 브랜드’를 높게 치는 것과 비슷하다.》
▽주택도 ‘디자이너 브랜드’ 앞세워=페트라건설은 최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 짓는 빌라 ‘비버리힐스 빌리아’에 이탈리아 미국 독일에서 활동 중인 산업 디자이너 6명을 영입했다. 생활용품은 필립 스탁, 가구와 벽지는 조르조 사포리티, 집 외관의 초벌 디자인은 리처드 마이어, 조명기구는 잉고 모레 씨가 담당한다고 회사 측은 밝혔다. 106∼167평형 33가구로, 최상층 수요자를 타깃으로 한다.
이 회사 김연상 대표는 “명품 핸드백이 오래 들어도 싫증나지 않는 것처럼, 상류층 주택도 같은 맥락에서 해외 전문 디자이너의 손길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며 “특히 조명이나 벽지 구성 등 예전에는 잘 드러나지 않았던 부분이 차별화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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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오롱건설이 판교신도시 인근인 경기 성남시 시흥동에 분양 중인 단독주택 ‘린든그로브’도 욕실 인테리어와 세면대, 주방용품 등에 디자이너 필립 스탁 씨의 손길을 담았다. 역시 고급 수요를 겨냥해 65∼87평형 50가구로 구성돼 있다.
▽디자인이 곧 인지도=오피스 빌딩들이 최근 지역의 상징물로 떠오른 데는 해외 디자이너의 참여가 높은 기여를 했다.
지난달 준공한 서울 강남구 삼성동 현대산업개발 본사인 ‘아이파크타워’가 대표적. 해체주의 설계자 다니엘 리베스킨트 씨가 기하학적 문양으로 외관을 꾸며 화제를 모았다.
지난해 말 준공된 SK텔레콤 을지로 사옥은 전체 33층 중 27층부터 15도 각도로 기울어진 모습이 인상적이라는 평인데, 이 역시 홍콩의 ‘RAD’ 설계팀의 애론 탄 씨가 디자인했다.
건물 상층부 개방감이 뛰어난 종로타워는 라파엘 비뇰리 씨, 웅장한 분위기의 강남교보타워는 마리오 보타 씨, 화려한 비늘을 덮고 있는 모양으로 리모델링된 압구정동 갤러리아 백화점은 벤 반 버클 씨가 디자인해 ‘도시 미관의 수준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직은 초기 단계=실제로 미국 유럽 등지에서는 최고급 주택 수요자들에게 ‘디자이너 브랜드’임을 앞세우는 경우가 많다.
우림건설 김수영 상하이 지사장은 “시공사 브랜드를 주로 앞세우는 국내와 달리 중국만 해도 부유층 주택 시장은 시행사와 디자이너 이름을 가장 중시한다”며 “가두 광고판에는 디자이너 사진이 가장 크게 노출될 정도”라고 말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아직 상업건물은 외관만 따로 디자인하고, 주택은 내부 인테리어만 담당하거나 외부 설계는 초안 디자인만 하는 식으로 계약하는 경우가 많다.
K건설사 상품개발 담당자는 “해외 유명 디자이너에게 빌라 전담 설계를 의뢰하려다 40만 달러(약 40억 원)를 요구해 결렬된 적이 있다”며 “국내에서 단가를 맞추기엔 아직 부담스러운 금액이며 이 때문에 부분 설계 의뢰를 하는 회사들이 많다”고 말했다.
조인직 기자 cij19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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