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회사 가운데 상당수는 증시에 투자하는 펀드들이다. 이곳 펀드가 한국에 투자해 큰 이익을 내더라도 이중과세방지협정에 따라 한국 정부는 과세할 수 없다.
말레이시아는 한국 증시에 투자하는 외국인 숫자 기준으로 미국 영국 일본 캐나다에 이어 5위에 올라 있다. 이 나라 회사(법인) 또는 개인 561명이 한국에 투자하고 있다.
도대체 이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국내 증시 외국인투자자 등록 현황 | |
국가 | 외국인투자자(명) |
미국 | 6,456 |
영국 | 1,431 |
일본 | 1,329 |
캐나다 | 946 |
말레이시아 | 561 |
룩셈부르크 | 524 |
아일랜드 | 498 |
기타 | 5,331 |
자료:금융감독원 |
전문가들은 라부안의 투자회사 대부분을 역외(域外)펀드로 보고 있다. 한국 사람이 이곳에 유령회사를 세우고 국내 증시에서 외국인 행세를 하는 이른바 ‘검은 머리 외국인’이라는 것.
▽검은 머리 외국인이 휘젓는 증시=최근 증시에서 정체 모를 외국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매매행태로 시장을 뒤흔들어 관심을 끌고 있다.
평소 거들떠보지도 않던 코스닥 중소형주와 테마주를 샀다 팔았다 하며 주가를 요동치게 만들고 있는 것.
이들은 외국인 매매 동향을 따라하는 한국 투자자들이 많다는 점을 악용하고 있다. 단기적으로 지분을 늘렸다가 추종 매매세력이 붙으면 재빨리 주식을 처분해 이익을 낸다. 거의 ‘합법적인 작전’에 가깝다.
0.33%에 불과하던 외국인 지분이 17, 18일 이틀 만에 8.79%까지 늘어난 성창기업을 비롯해 최근 외국인 지분이 급증했다가 사실상 하나도 없어진 화인에이티, 세림테크 등이 이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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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시 전문가들은 이들 종목에 투자한 외국인을 검은 머리 외국인으로 추정하고 있다.
여러 창구에서 주식을 분산 매수한 뒤 한꺼번에 팔고 나가는 매매 패턴은 1, 2개 증권사 창구를 통해 우량 종목을 꾸준히 매수하는 일반적인 외국인 매매행태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식별이 어렵다=금융감독원에 따르면 한국 증시에 투자하는 외국인 가운데 말레이시아 아일랜드 룩셈부르크 등 조세회피지역에 근거를 두고 있는 외국인 비중은 10% 정도. 하지만 이들의 주식거래 비중은 20%가량 된다.
문제는 이들 가운데 상당수로 추정되는 검은 머리 외국인을 식별해낼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외국인은 금감원에 외국인이라고 신고만 하면 국내 증시에 투자할 수 있다. 한국인이 역외펀드를 이용해 외국인으로 등록해도 현실적으로 ‘가짜’를 가려낼 방법이 없다.
▽외국인의 영향력이 낳은 병폐=검은 머리 외국인과 관련해 기업들에도 원죄가 있다.
외환위기 직후 경영난에 몰린 기업들은 주가를 끌어올리기 위해 너도나도 외자 유치에 나섰다.
해외전환사채(CB)나 신주인수권부사채(BW) 발행을 통해 외자를 유치했다고 선전하는 기업이 1999년 이후 줄을 이었다. 호재성 공시에 기업의 주가도 덩달아 올랐다. 기업은 오른 주가를 바탕으로 유상증자에 나서 회생 자금을 마련했다.
당시 외국인 투자자는 대부분 이런 역외펀드였다. 검은 머리 외국인을 이용해 회사를 살리려던 생각이 결국 역외펀드 세력을 키우고 그들에게 투자 노하우를 알려준 것.
최근에는 외국인이 국내 증시에 미치는 영향을 과도하게 포장해 검은 머리 외국인의 활동 공간을 넓혀준다는 지적도 있다. LG경제연구원 이철용 부연구위원은 “검은 머리 외국인의 준동을 막기 위해서는 국내 증시가 스스로 자정 능력을 키워야 한다”며 “외국인 따라하기 매매를 자제하고 국내 기관들이 제 역할을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완배 기자 roryrery@donga.com
:검은 머리 외국인:
내국인이면서 외국인을 가장해 증시 등에 투자하는 세력. 외국에서 계좌를 만들고 금융감독원에도 외국인으로 등록한 뒤 외국인 계좌를 이용해 주식을 매매하지만 실제로는 한국인들이다.
▼유령 역외펀드의 실태…삼성전자주 1700억대 허위매수 사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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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2000년 코스닥 시장이 활황세를 보일 때 역외펀드가 위세를 떨쳤다.
국내 작전세력이 기업과 짜고 말레이시아 등에 역외펀드를 만들어 자금을 보낸 뒤 이를 기업에 다시 투자했다. 기업은 “외자를 유치했다”고 선전해 주가를 올렸다.
‘검은 머리 외국인’과 관련된 가장 큰 사고는 2002년 12월 17일 생긴 ‘홍콩 사건’이다.
당시 명목상 해외 기관투자가인 홍콩의 OZ캐피털 등은 LG투자증권에 12개 계좌를 터놓고 삼성전자 주식 1700억 원어치를 사들였다. 그러나 이들은 매수 뒤 주식 대금을 내지 않고 사라졌다.
검은 머리 외국인들이 유령회사를 통해 삼성전자 주식을 사는 방식으로 주가를 조작했다고 증시 관계자들은 추정했다.
이듬해 5월 금융감독위원회는 이 미수 사고의 주범이 한국인 홍모 씨 등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말에는 외국인들이 창투사 주식을 집중 매수하며 주가를 올려 ‘검은 머리 외국인의 작전’이라는 소문이 증시에 퍼졌다.
몇몇 창투사 주가가 정체 모를 외국인의 입질과 개인투자자의 추격 매수로 단번에 상한가를 쳤다. 그러나 검은 머리 외국인으로 추정되는 이들은 하루나 이틀 뒤 주식 대부분을 팔아 이익을 챙기고 사라졌다.
이완배 기자 roryrer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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