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장비를 만들어 대기업에 납품하는 중소기업 Y사의 이모 재무이사는 지난 1년이 지옥 같았다. 나름대로 기술력도, 성장성도 있다고 자부했지만 ‘돈줄’이 막혀 식구처럼 지내던 직원 20명 가운데 절반을 내보내야 했기 때문. 지난해 초 기술신용보증기금의 보증을 받아 한 시중은행에서 3억5000만 원을 대출받았지만 이 중 5000만 원은 ‘구속성 예금’(일명 꺾기)에 바로 넣어 만져보지도 못했다. 나머지 3억 원은 금세 바닥났다. 테스트 장비를 사는 데 2억 원을 쓰고 1억 원은 여기저기 쪼개 쓰다 보니 어디에 썼는지 표시도 나지 않았다. 공장과 부동산 등 모든 자산은 이미 담보로 잡혀 더 이상 은행 대출은 불가능했다. 몇 달 뒤면 들어올 매출채권 장부를 보여 줘도 소용이 없었다.》▽중소기업발(發) 금융위기 오나=한덕수(韓悳洙)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최근 “연체율이 높아지고 있는 중소기업 대출에 대한 모니터링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28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은행권의 중소기업 대출 연체율은 작년 6월 말 2.3%에서 12월 말 2.2%로 떨어졌으나 올해 1월 말 2.5%, 2월 말 2.8% 등으로 높아지고 있다.
은행의 중소기업 대출도 눈에 띄게 줄었다.
한국은행이 집계한 은행의 중소기업 대출 잔액은 2월 말 현재 237조8141억 원으로 1년 전에 비해 3조1528억 원 늘어나는 데 그쳤다. 1년 전에 32조2009억 원이 증가한 데 비하면 크게 줄어든 것.
특히 1, 2월 중소기업 대출만 보면 2003년과 2004년에는 각각 8조5209억 원, 5조9323억 원이 늘었지만 올해는 2조1849억 원 증가에 그쳐 뚜렷한 퇴조세다.
시중은행 중소기업 대출 관계자는 “은행권 전체 중소기업 대출 잔액의 70%가 1년 이내에 만기가 돌아온다”며 “만기 연장이나 상환이 순조롭게 이뤄지지 않으면 중소기업발 금융위기가 현실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왜 대출 어렵나=중소기업 대출까지 총괄하는 국민은행 허인 대 기업팀장은 은행들이 중소기업 대출을 꺼리는 이유를 두 가지로 요약했다.
하나는 차주(借主)의 신용 수준까지 고려해 은행의 자산 건전성을 평가하는 ‘신(新)바젤협약’ 때문. 즉 지금은 연체만 하지 않으면 신용 수준은 문제되지 않지만 앞으로는 신용등급이 낮은 차주에 대한 대출이 많을수록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이 낮아지는 것.
허 팀장은 “신바젤협약은 2007년 말 발효하지만 과거 3년치 대출실적을 따지기 때문에 이미 효력이 생긴 셈”이라고 말했다.
재무제표를 믿을 수 없는 중소기업이 많다는 것도 문제다.
허 팀장은 “중소기업 임원 중에는 엉터리 재무제표를 내놓고 ‘왜 밀어주지 않느냐’며 큰소리를 치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덧붙였다.
한국금융연구원 신용상(申龍相) 연구위원은 “중소기업 지원정책 때문에 경쟁력 없는 업체가 연명하는 것이 더 큰 문제”라며 “경쟁을 통해 경쟁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신용보증제도나 중소기업 관련 제도를 고쳐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경준 기자 news9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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