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 상생의 봄이 오나…올들어 임단협 무분규 타결 잇따라

  • 입력 2005년 3월 31일 17시 24분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전남 여수시 월내동의 GS칼텍스(옛 LG칼텍스 정유) 여수공장 본관 3층 회의장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지난해 7월 대규모 파업으로 충돌을 빚었던 노조와 회사가 마주앉아 ‘2005년 단체협약 갱신교섭 조인식’을 갖는 자리였다. 하지만 박주암(朴珠岩) 노조위원장 직무대행이 입을 떼면서 분위기는 확 바뀌었다. 박 대행은 “지난해 파업으로 충분히 홍역을 치렀다”면서 회사에 임금결정권을 넘겼다. 그는 “임금협상, 단체협상보다 생산적 활동에 매진하는 것이 노사상생의 길이라고 조합원들이 뜻을 모았다”고 설명했다.》

이 회사 노조가 사 측에 임금인상안을 위임한 것은 1971년 노조 창립 이후 처음이다. 회사 측은 이를 반기면서 올해 임금을 기본급 기준으로 4.1% 올려주기로 약속했다.

이처럼 노조가 회사에 임금교섭을 맡기는 등 분규 없이 임단협을 타결하는 대기업이 올해 들어 잇따라 나타나고 있다.

‘무노동 무임금 원칙’이 자리 잡으면서 노조원들이 ‘실익 없는 파업’에 부정적 반응을 보이는 데다 과도한 분규로 기업이 경쟁력을 잃으면 일자리 자체가 위협받는다는 생각이 확산됐기 때문이다.

▽임금협상 위임 노조 늘어난다=올해 1월 E1(옛 LG칼텍스가스) 노조가 임금교섭권을 회사에 넘긴 것을 시작으로 STX에너지 STX엔파코 동국제강 유니온스틸 LG전자 GS칼텍스 대우건설 노조가 잇따라 교섭 없이 회사에 임금인상을 위임했다.

문명운(文明運) STX엔파코 노조위원장은 “급여 인상보다는 ‘고용 보장’을 중시해야 한다는 데 조합원들이 뜻을 같이했다”면서 “고용이 보장되려면 회사가 안정돼야 한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창사 이후 최대인 2조240억 원의 이익을 낸 하이닉스반도체 노조도 임금교섭권을 회사에 위임해 업계를 놀라게 했다. 원-달러 환율 하락(원화가치 상승) 등 경영환경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노조가 경쟁력의 원천이 돼야 한다는 것이 위임의 이유였다.

‘무분규 기록’을 이어가는 기업도 늘고 있다. E1은 10년째, 동국제강과 계열사인 유니온스틸은 각각 11년과 12년째 ‘무교섭 임단협 타결’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분위기가 ‘노사 상생(相生)’으로 전환되면서 올해 ‘춘투(春鬪)’는 여느 해와는 다른 양상을 보일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정종수(鄭鍾秀) 노동부 노사정책국장은 “4월 중 비(非)정규직 관련 법안 통과 문제가 남아 있지만 올해 노사관계는 전체적으로 안정기조를 유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원칙 준수가 노사문화를 바꾼다=“외부 단체가 파업을 주도하고 난 뒤 남은 것은 물질적 손해뿐이었다.” 지난해 파업을 한 A기업 노조원의 얘기다.

노사분규에 대한 노조원들의 태도가 급속히 바뀐 가장 큰 이유는 지난해부터 대기업들이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철저히 적용했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2002년 파업을 겪은 두산중공업은 파업 기간의 보수에서 50%에 해당하는 금액만 2003년에 생계비 지원을 위해 지급했다. 50%를 지급한 것도 정부의 중재안 때문이었다. 공기업이던 ‘한국중공업’ 시절 파업이 끝난 뒤 어떤 방식으로든 파업기간의 임금을 줬던 것과는 크게 달라진 모습이었다.

외국인이 대주주인 기업이 늘면서 노사관계에 ‘글로벌 스탠더드’가 확산된 것도 노사문화를 바꾼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씨티은행에 합병된 한미은행이나 LG칼텍스 노조가 지난해 파업을 벌일 때 외국인 대주주들은 “파업이 장기화돼도 노조에 일방적으로 양보하지 말라”고 경영진에 주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파업이 끝난 후 파업을 주도한 노조 간부들은 해고 등 중징계를 받았으며 일부는 구속됐다.

올해 1월 터진 기아자동차 채용비리 사건, 2월의 민주노총 대의원 대회 폭력사태의 영향으로 노동운동의 도덕성이 훼손된 것도 노사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정일(李禎一)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최근 노조 내부에서 혁신과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면서 “원화가치 상승, 고(高)유가 등으로 기업의 대외환경이 악화되는 상황에서 노조의 합리적 변화는 한국경제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

주성원 기자 swon@donga.com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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