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영회장 별세]‘브로몽의 악몽’ 앨라배마서 갚는다

  • 입력 2005년 5월 23일 09시 22분


《“현대자동차의 최우선 과제는 품질이며 우리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입니다. 앨라배마에서 직원을 선발하고 그들을 훈련시키면서 (우리는)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가장 적절한 팀’을 선택했다고 확신하게 됐습니다.” 20일(현지 시간) 미국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 시 ‘현대 대로(Hyundai Boulevard)’ 700번지. 정몽구(鄭夢九) 현대·기아자동차그룹 회장의 영어 연설에 현대차 미국공장 현지 임직원들은 일제히 환호성과 함께 기립 박수를 보냈다.》

○ 브로몽의 ‘악몽’을 넘어서

1989년 7월 현대차는 캐나다 퀘벡 주 브로몽에 연산 10만 대 규모의 ‘쏘나타’ 공장을 준공했다. 현대차를 이끌던 정세영 당시 회장은 캐나다를 교두보로 북미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1985년 캐나다에 7만9000대를 수출해 북미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켰던 현대차로서는 해볼 만한 승부수였다. 공장부지 50만 평을 단돈 1달러에 내주겠다는 캐나다 정부의 적극적인 제안도 있었다.

1986년 캐나다 퀘벡 주 브로몽 현지 공장 기공식에서의 고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가운데). 1989년 완공돼 쏘나타를 생산하던 이 공장은 판매 부진으로 1993년 문을 닫았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공장 건립은 1986년 9월부터 3년간 이어졌다. 현대차는 이 공장에 3억2000만 캐나다달러(당시 환율로 약 2억9000만 달러)를 쏟아 부었다.

그러나 일본 자동차의 미국 현지생산이 늘어나면서 ‘공급 과잉’ 상태였던 북미 시장에서 품질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던 현대차가 설 자리는 없었다.

결국 1993년 10월 브로몽 공장은 누적 적자를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현대차에서는 이때의 아픈 기억을 ‘브로몽의 악몽’이라고 부른다.

고 정세영 명예회장은 자서전에서 “충분한 시장 조사 없이 북미 공장을 건설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성급한 결정이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고 토로했다.

2005년 5월 20일. 현대차는 다시 자동차의 본고장인 미국에 공장을 세우고 승용차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앨라배마 공장은 이제 정 명예회장이 생전에 이루지 못하고 가슴에 묻어뒀던 숙원을 ‘조카’가 풀어주는 의미도 지닌다.

○ 이제는 품질로 승부한다

1989년 브로몽 공장 준공 이후 16년이 흘렀다.

앨라배마 공장 준공 행사가 끝난 뒤 쏘나타 생산라인으로 복귀한 현지 직원들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실린더 헤드 조립라인에서 일하는 지니 커(42·여) 씨는 “두 달 이상 생산 교육을 받으며 최고 품질의 차를 만들 자신이 생겼다”고 말했다.

현대차가 11억 달러(약 1조1000억 원)를 투자한 이 공장은 최첨단 자동화 설비로 시간당 최대 73대를 생산할 수 있다. 5400t짜리 대형 프레스 두 대가 숨 가쁘게 차체를 찍어내면, 255대의 로봇이 부지런히 용접에 나선다. 직원들은 장비의 조정업무만 맡으면 된다.

미국에서도 자동차 산별노조의 힘이 강하지만 이 공장에는 노조가 없다. 엔진조립 부문에서 일하는 숀 보든(29) 씨는 “임금이나 복지 수준이 좋기 때문에 노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노조를 만들 생각도 없다”고 말했다. 임금은 시간당 14.22달러에서 시작해 근무시간에 따라 늘어난다.

공장 생산기술담당 윤호원(尹虎遠) 이사는 “직원들의 자동차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고 꼼꼼히 일을 처리해 품질이 좋은 편”이라며 “판매가 늘어나고 있어 7, 8월부터는 주야 2교대 근무를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 “한국차는 매력적”

21일 오전 미국 뉴욕 맨해튼 11번가 현대차 전시장.

총지배인 빈센트 테피디노 씨는 “20년 동안 도요타를 팔다가 현대차가 뜨는 것을 보고 현대차 딜러로 변신했다”고 말했다. 그는 “처음 시작한 2003년 말에는 한 달에 34∼40대를 팔았으나 요즘은 매월 100대 이상 판다”고 덧붙였다.

이 전시장에 나온 신형 쏘나타 가격은 2만2345달러. 나란히 전시돼 있는 EF쏘나타(2만144달러)에 비해 2000달러(약 200만 원) 이상 비싸지만 미국 고객들의 관심이 높다.

신형 쏘나타는 바로 16년 전 현대차가 브로몽 공장에서 실패했던 쏘나타 5세대 모델이다. 한국 차에 대한 미국 소비자의 인식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몽고메리·뉴욕=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

주성원 기자 s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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