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갤러리아백화점 스포츠 브랜드숍 강인찬(28) 매니저의 취미는 희귀 신발 수집이다. 지난해 아디다스가 35주년을 기념해 디자인이 다른 35켤레의 ‘슈퍼스타’ 운동화를 발매했을 때 강 씨는 31켤레를 사 모았다. 여기에만 1000만 원을 썼다.
회사원 성진경(25·여·서울 마포구 도화동) 씨는 주변 사람들에게 ‘명품 패션리더’로 통한다. 지난해 한창 유행하던 200만 원짜리 ‘발렌시아가’ 핸드백도 누구보다 먼저 들었다. 미국 할리우드 영화배우들의 최신 유행을 조사하고 구입 방법을 알아낸 뒤 기어코 샀다.
화장품 의류 액세서리 등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제품일수록 고가 제품이 잘 팔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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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의 고급 한방화장품 ‘설화수’는 매출이 2001년 1650억 원에서 2004년 3330억 원으로 갑절로 늘었다. 같은 기간 중급 브랜드 ‘라네즈’의 매출은 1120억 원에서 760억 원으로 크게 줄었다.
고급 세탁기 바람을 일으킨 LG전자의 드럼세탁기는 2001년 처음 시판된 이후 4년 만인 지난해 일반 세탁기보다 많이 팔렸다.
LG상사 패션부문 구본걸(具本杰) 부사장은 “요즘 소비자들은 자기 기준에 예쁘다는 판단이 서면 쉽게 구매결정을 내린다. 가격은 그다지 민감하지 않다”고 말했다.
200만 원짜리 핸드백을 들고 다니는 성 씨도 생필품 쇼핑은 ‘알뜰족’이다. 화장품 샘플 쿠폰을 받기 위해 백화점으로 달려가고, 샴푸를 덤으로 주는 행사에 줄을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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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필품은 싸지 않으면 안 팔리는 추세가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다.
할인점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상품은 할인점 자체 브랜드(PB)가 붙은 생필품이다. 이마트의 PB 상품 매출은 2002년 2700억 원에서 2004년 8500억 원으로 늘었다.
제일기획은 이달 초 발표한 ‘포스트 디지털 시대의 소비자’ 보고서에서 “13∼24세 연령층은 야누스(두 개의 얼굴을 가진 신)적인 소비 행태를 보인다”고 분석했다.
갖고 싶은 물건은 값에 구애받지 않는 소비 행태를 보이면서도 쿠폰, 마일리지 등 할인 기회는 악착같이 쓴다는 것이다.
경영컨설팅회사인 IBM 비즈니스컨설팅서비스(BCS)의 이성열(李誠烈) 대표는 “감성 제품은 상향 구매를 하고, 생필품은 하향 구매를 하는 소비 경향은 전 세계적인 추세”라고 설명했다. 보스턴컨설팅은 이런 소비 경향을 ‘트레이딩 업’과 ‘트레이딩 다운’이라는 용어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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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 패턴의 변화가 유통업계에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저가 상품을 파는 할인점과 고가 상품 중심의 명품 백화점 또는 ‘카테고리 킬러’(전문점)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국내 할인점 매출은 2001년 13조9000억 원에서 2004년 21조4000억 원으로 늘었다. 같은 기간 백화점 매출은 16조4000억 원에서 16조5000억 원으로 제자리걸음.
할인점 삼성테스코 이승한(李承漢) 사장은 “중가(中價) 제품 일색이던 일본의 대형 양판점이 침체에 빠진 것은 이런 소비 경향을 간과했기 때문”이라며 “유통업은 고가와 저가로 나뉘어 일대 격전이 벌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해외에서는…▼
‘아주 비싸거나, 아주 싼’ 제품의 구매를 늘리는 소비 패턴은 해외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갭사(社)는 고가, 중가, 저가 브랜드를 모두 갖추고 있는 미국의 대표적 의류업체. 최근 5년(1999∼2003년) 동안 가격대별 대표 브랜드의 연평균 매출 성장률을 조사한 결과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저가 브랜드 ‘올드 네이비’와 고가 브랜드 ‘바나나 리퍼블릭’은 각각 연평균 13%, 9%가량 성장한 반면 중가 제품인 갭은 평균 2% 성장에 그쳤다.
옷 입는 데 가치를 두는 소비자는 바나나 리퍼블릭에서 만족을 얻었고 옷을 생활필수품처럼 여기는 소비자는 올드 네이비를 구매한 것.
화장품도 고가와 저가 브랜드가 잘 팔리는 반면 중가 브랜드는 매출이 줄어드는 추세다.
슈퍼마켓에서 살 수 있는 미국의 저가 화장품 ‘커버 걸’은 1999∼2002년 연평균 4.3%의 성장세를 보였다. 고가 화장품 ‘클리니크’는 같은 기간 7.6% 성장했다.
반면 중가 제품인 ‘레블론’은 매출이 5.2% 감소했다.
중산층 소비자까지 명품 구매에 합류하면서 매스티지(Masstige·대중명품) 브랜드도 호황을 누리고 있다. 경제적 부담 때문에 명품을 사지 못하지만 고급스러운 제품을 원하는 중산층 소비자를 겨냥한 것이다.
속옷 브랜드 ‘빅토리아 시크릿’은 최고가 제품 ‘라펠라’와 중가 제품 ‘메이든 폼’ 사이의 매스티지 브랜드로 세련된 매장의 실내장식과 고품질, 감성을 추구해 인기를 얻었다.
중저가 스웨덴 의류업체 ‘H&M’이 ‘샤넬’의 수석디자이너 칼 라거펠트와 손잡고 지난해 11월 선보인 준명품 ‘라거펠트 컬렉션’은 발매 30분 만에 모두 팔렸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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