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씨 내일 귀국]대우그룹 왜 몰락했나

  • 입력 2005년 6월 13일 03시 09분


1999년 7월 19일. 김우중(金宇中) 전 대우그룹 회장은 개인재산 1조3000억 원을 포함해 총 10조 원의 담보를 채권은행에 내놓겠다는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한 달여 후인 8월 26일 대우그룹 12개 주력 계열사는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에 들어갔다. 11월 1일 김 전 회장을 비롯한 계열사 사장단이 모두 물러나 대우그룹은 완전히 ‘공중분해’되는 운명을 맞았다.

대우그룹의 몰락은 한국 경제를 흔들어 놓은 일대 ‘사건’이었다.

‘세계경영’의 깃발을 내걸었던 대우그룹의 패망은 한국식 성장모델의 한계점을 드러냈다. 이를 계기로 한국에서 통용됐던 ‘대마불사(大馬不死)’의 신화는 무너졌고 대기업의 문어발식 확장과 그룹 총수의 전횡에 제동이 걸렸다.

그러나 김 전 회장을 비롯한 전직 대우그룹 인사들은 분식회계 등 잘못을 일부 인정하면서도 그룹을 공중분해한 것 자체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반박하고 있다.

○세계경영의 허(虛)와 실(實)

1998년 말 대우그룹은 ㈜대우 대우자동차 대우중공업을 중심으로 계열사 41개, 국내 종업원 10만5000여 명, 해외법인 396개를 거느리며 재계 순위 2위까지 올랐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김 전 회장의 철학처럼 1993년부터 시작된 ‘세계경영’은 정점으로 치닫는 것 같았다. 특히 해외법인의 고용 인력이 국내 인력을 넘어서면서 그는 세계적인 뉴스메이커로 등장했다.

하지만 화려한 외형 성장의 뒷면에는 부실의 싹이 숨겨져 있었다.

대우의 세계 경영은 대부분 공산권 또는 저개발 국가를 대상으로 했다. 이런 국가는 사업초기 거액의 자본이 들어가지만 이익을 내기까지 통상 5, 6년이 걸린다는 단점을 안고 있었다. 따라서 대우그룹이 망하기 전까지 돈을 제대로 버는 해외사업장은 별로 없었다.

특히 대우는 해외 투자자금을 대부분 외부 차입에 의존했고 그 중심에는 영국금융센터(BFC)가 있었다. 자금거래 관계가 하도 복잡해 지금도 김 전 회장 외에는 정확한 내용을 모를 정도였다.

○외환위기가 치명타

한국의 대기업들은 1997년 말 외환위기로 큰 타격을 받았다. 특히 금리가 연 30%로 뛰면서 차입경영을 해왔던 대우그룹은 이자 부담이 눈 덩이처럼 커졌다.

또 해외 채무가 많았던 대우그룹은 달러당 원화 환율이 2000원까지 급등(원화가치는 급락)하면서 곳곳에서 곪았던 상처가 터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한보철강 기아자동차 등 대기업 연쇄 부도를 겪으며 휘청거리던 은행 등 국내 금융기관들은 과거에는 눈감고도 빌려줬던 대출금을 서둘러 회수하기 시작했다.

김 전 회장은 1998년 초 김대중(金大中) 당시 대통령당선자에게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500억 달러의 무역흑자론’을 제시하며 수출 위주의 경제체제 개편을 주장했다.

그러나 1999년 당시 이헌재(李憲宰) 금융감독위원장과 강봉균(康奉均) 재정경제부 장관 등은 무분별한 과잉투자를 해 온 대기업을 외환위기의 ‘주범(主犯)’으로 지목했고 특히 김 전 회장을 ‘대표주자’로 간주했다. 초기에 DJ의 관심을 끌었던 무역흑자론은 시간이 지나면서 폐기 처리됐다.

이 기간에 대우는 연 30%의 기업어음(CP) 15조 원을 발행하며 버텼지만 역부족이었다.

1998년 그룹 구조조정의 핵심전략이었던 대우자동차-GM 합작 추진마저 흔들리면서 그룹의 운명은 김 전 회장의 손을 떠나 정부와 채권단에 넘어갔고 대우는 해체의 길로 접어들었다.

김두영 기자 nirvana1@donga.com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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