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 남서쪽으로 90km가량 떨어진 샤르트르 시. 파리에서 차로 1시간가량 걸리는 이곳에 국내 화장품회사 태평양의 글로벌 전략기지인 ‘퍼시픽 유럽(Pacific Europe)’이 자리 잡고 있다.
‘향수의 나라’ 프랑스에서 시장 점유율 3, 4위를 다투는 태평양의 ‘롤리타 렘피카’ 향수가 이곳에서 만들어진다.
퍼시픽 유럽의 공장장과 근로자는 모두 프랑스 현지인이다. 전인수(田寅秀) 퍼시픽 유럽 지사장은 “이곳에서는 내가 유일한 한국인”이라며 “프랑스 시장을 뚫기 위해 이곳 사정을 잘 아는 현지인들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태평양 이상우(李相祐) 부사장은 “화장품은 패션과 함께 세계화가 가장 많이 진전된 분야”라며 “품질 브랜드 마케팅에서 글로벌 경쟁력이 없는 회사는 수년 내 도태할 것”이라고 했다.
○ 화장품 ‘한류(韓流)’를 꿈꾼다
파리 시내 ‘갤러리 라파예트’ 백화점 1층 향수 매장.
형형색색의 수백 가지 향수가 내뿜는 향기에 눈과 코가 흠뻑 젖는다. ‘파리에서는 향수에 취한다’고들 하던데 정말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 틈을 비집고 노란색 상자 속의 보라색 향수병이 눈에 띄었다. 롤리타 렘피카였다. 바로 길 건너 프렝탕 백화점 향수 매장에서도 롤리타 렘피카는 비교적 눈에 잘 띄는 자리에 진열돼 있었다.
롤리타 렘피카는 1997년 파리 시장에 첫선을 보인 이후 8년 만에 파리에서 손꼽히는 향수 브랜드로 성장했다. 이 성공에 고무된 태평양은 2003년 ‘아모레 퍼시픽’ 브랜드로 미국 뉴욕에 진출했다. ‘루이뷔통’, ‘엘리자베스 아덴’ 등 명품 매장이 즐비한 뉴욕 맨해튼 5번가의 최고급 백화점 ‘버그도프 굿맨’에 매장을 냈다.
태평양 김봉환(金鳳奐) 국제사업팀장은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려는 의지를 담아 회사의 영문명을 붙인 새 브랜드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유럽과 미국 시장 진출이 걸음마 단계인 데 비해 아시아 시장은 ‘뷰티 한류’의 정착 가능성이 비교적 높은 곳이다.
LG생활건강은 한국 드라마의 인기가 높은 베트남에서 한류 바람에 편승해 ‘드봉’을 히트 상품으로 만들었다.
저가(低價) 화장품업체인 ‘더 페이스샵’은 홍콩 대만 싱가포르 몽골에 34개 점포를 여는 등 아시아 시장 진출에 적극적이다.
더 페이스샵 정운호(鄭芸虎) 사장은 “한류 스타 권상우를 모델로 기용해 기대 이상의 효과를 봤다”며 “일본 미국 등 글로벌 시장 공략에 사활을 걸고 있다”고 말했다.
○ 한국 화장품은 텃밭에서만 1위?
‘한국 여성은 화장품에 대한 요구 수준이 높은 세련되고 까다로운 소비자다.’
국내 진출 해외 화장품 업체 관계자들은 한국 소비자에 대해 혀를 내두른다. 화장품에 대한 안목이 높을 뿐 아니라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면 기꺼이 구매하기 때문이다.
국내 기업에 이런 소비자들은 경쟁력의 원천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소비자에게 수십 년 동안 물건을 팔아온 국내 화장품 업체들의 경쟁력은?
아쉽게도 국내 화장품 업체들의 글로벌 위상은 아직은 걸음마 수준에 머물고 있다.
태평양은 ‘샤넬’ ‘랑콤’ 등 쟁쟁한 해외 화장품들의 공세에서도 1950년 이후 한국에서 1위 자리를 내 준 적이 단 한 차례도 없다.
그러나 미국 미용 전문지 ‘WWD(Women’s Wear Daily)’에 따르면 2003년 매출액 기준으로 태평양은 세계 24위에 불과하다. 전체 매출액에서 차지하는 해외 비중도 10%(2004년 기준)에 그친다.
일본의 ‘시세이도’는 세계 4위, 해외 매출 비중은 27.5%(올해 3월 기준)다. 프랑스 화장품 회사인 로레알은 매출의 85%가 해외 시장 판매에서 나온다.
○ 철저한 현지화 전략이 열쇠
태평양이 프랑스 향수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현지화에 주력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패션 디자이너 ‘롤리타 렘피카’의 이름을 따서 향수 브랜드를 만든 데 이어 현지인들의 손으로 제품을 생산하도록 했다.
퍼시픽 유럽 재무파트에서 일하는 세실리아 빌로앙(32·여) 씨는 “가끔 한국인 사장님을 보거나 1년에 한 번 정도 불고기 파티를 열 때 빼고는 한국 회사로 느껴지지 않는다”며 “다른 프랑스 회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전 지사장은 “현지화 및 브랜드 고급화 전략이 성공을 거두면서 롤리타 렘피카는 이제 프랑스 시장을 넘어 세계 80여 개국으로 수출되고 있다”고 말했다.
세계 최대 화장품업체인 로레알은 현지화와 글로벌 마케팅으로 성장한 대표적인 업체다.
로레알 커뮤니케이션 담당 마이크 럼스비 부사장은 “프랑스 화장품이 세계의 기준이라는 생각을 버린 다음에야 진정한 글로벌 기업이 될 수 있었다”면서 “현지 소비자가 원하는 화장품이 로레알에 없으면 새로운 제품을 내놓거나 현지 브랜드를 인수한다”고 말했다.
럼스비 부사장은 “인수한 현지 브랜드 제품들은 글로벌 마케팅을 통해 다른 나라에서도 인기를 얻는 제품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태평양 서경배(徐慶培) 사장은 “미주지역은 ‘아모레 퍼시픽’, 아시아는 ‘라네즈’, 프랑스는 ‘롤리타 렘피카’로 각각 특성에 맞게 현지 시장을 공략할 계획”이라며 “10년 후 화장품 글로벌 브랜드 톱 10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과연 세계 화장품 시장에서 한류의 꿈은 이루어질 것인가.
파리=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佛 로레알社 인사총괄부회장“각국 직원의 다양성이 힘”▼
“다양한 국적을 가진 직원들이 로레알의 다양성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다양성이 로레알을 글로벌 기업으로 만드는 힘입니다.”
프랑스 화장품업체 로레알 그룹의 인사총괄 담당 제프 스킹슬리(사진) 부회장. 그는 21일(현지 시간) 파리 본사에서 가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프랑스어와 영어, 그리스어 등이 섞인 직원들의 수다소리가 인상적이라고 말하자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역시 영국사람이었다.
스킹슬리 부회장은 “얼마 전 스페인 지사를 방문했는데 전체 직원 중 스페인 국적이 아닌 직원이 50여 명이나 됐다”며 “어느 지사를 가도 다양한 국적의 직원들을 만날 수 있다”고 말했다.
“아시아는 아시아의 미(美)가, 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의 미가 존재합니다. 각 지역 사람들이 원하는 것에 우리 제품을 맞추려면 다양한 출신의 직원들이 필요합니다.”
그는 “로레알의 가장 큰 자랑은 매출액의 3%(약 8000억 원)를 매년 연구개발(R&D)에 투자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런 투자를 바탕으로 대중시장과 고급시장 등 구매력 기준으로 시장을 세분화하거나 아시아인 아프리카인 서구인 등 인종별로 시장을 나눠 각 시장에 맞는 브랜드를 만들고 있다고 설명했다.
로레알은 사람을 채용하는 데 있어서도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있다. 전 세계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마케팅 대회를 열어 우수한 인재를 미리 뽑아두거나 인턴십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로레알은 지난해 4만3000여 명을 인터뷰해 이 중 1800여 명을 채용했다.
스킹슬리 부회장은 우수한 인재야말로 로레알 글로벌 전략을 이끄는 힘이라고 강조했다.
“로레알의 인재는 ‘시인과 농부’를 결합한 스타일입니다. 시인은 호기심과 무한한 상상력으로 이상을 꿈꾸고, 농부는 땅을 딛고 현실을 직시하죠. 무한한 호기심이 있으면서도 현실을 볼 줄 아는 그런 인재가 필요합니다.”
파리=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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