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권 세습 위한 CB 발행 인정=재판부는 CB 발행 배경에 대해 “신용등급이 양호했던 에버랜드로서는 금융기관 차입, 회사채 발행, 회원권 분양 등 다른 방법이 가능했는데도 CB를 발행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이재용 씨 등이 100억 원도 안 되는 돈으로 에버랜드 지분 64%를 차지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번 사건의 중요한 쟁점은 과연 비상장 회사 CB의 적정가를 어떻게 산정하느냐와 CB를 저가에 발행했다 해도 그것이 회사에 대해 손해를 끼친 것(배임)으로 볼 수 있느냐는 것 두 가지였다.
변호인 측은 “CB를 저가에 발행한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설령 저가에 발행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CB 인수를 포기한 회사 또는 에버랜드의 다른 주주들의 손해라면 몰라도 에버랜드 회사 자체에 손해를 끼쳤다고는 볼 수 없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재판부는 “피고인들은 CB를 저가에 발행함으로써 회사에 들어왔어야 할 자금보다 적은 자금이 유입되게 해 손해를 끼쳤다”고 판결했다.
▽CB 발행 무효화는 어려울 듯=이 판결로 CB 발행 자체가 무효로 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재판부는 “이사회를 열기 위해서는 이사 17명의 절반이 넘는 9명 이상이 이사회에 출석해야 했지만 8명의 이사만이 이사회에 출석했다”고 밝혔다. 에버랜드는 당시 미국 출장 중이던 이사 한 명의 동의를 얻어 이사회 개최 정족수를 채웠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 같은 이사회 결의는 무효라고 판결문에 명시했다.
이사회 결의가 무효일 경우 CB 발행 자체도 무효로 되는지에 대해서는 상법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있다.
문제는 CB 발행이 법적으로 무효라는 사실을 소송을 통해 확인하는 것, 다시 말해 CB 발행을 없었던 것으로 만드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점이다.
상법은 CB 발행 등 신주 발행 과정에 위법이 있을 경우 주주들이 소송(CB 발행 무효의 소)을 제기하는 절차를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누가 소송을 제기하느냐가 문제다. 이 소송은 에버랜드의 주주들이 제기할 수 있는데 에버랜드의 주주는 모두 삼성 계열사이거나 이건희 회장과 특수 관계에 있는 사람이다. 이들이 소송을 낼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더욱이 이 소송은 CB 발행 6개월 안에 내지 않으면 효력이 없다.
따라서 이날 판결로 CB 발행 자체를 무효화해서 이재용 씨에게 넘어간 CB를 ‘없었던 것’으로 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전환사채(轉換社債·CB·Convertible bond):
주식회사가 일반 대중에게서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집단적 대량적으로 발행하는 회사채. 일정 기간이 지난 뒤 소유자는 이를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다.
전지성 기자 verso@donga.com
■ 경영권 승계 어떻게 되나
허태학 삼성에버랜드 전 사장(왼쪽)과 박노빈 사장이 4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에버랜드 전환사채 관련 재판에 출석한 뒤 법정을 나서고 있다. 법원은 기존 주주들이 실권하자 에버랜드의 전환사채를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에게 싼 값으로 배정한 것은 업무상 배임에 해당한다며 유죄를 선고했다. 안철민 기자 |
다만 삼성그룹의 경영권 상속이 편법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을 법원이 인정했기 때문에 도덕적 비난은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삼성그룹은 외부로부터 기업지배구조 개선에 대한 강한 압박을 받고 있기 때문에 이번 판결로 줄줄이 남아 있는 쟁점 사안에서 더 불리해질 가능성도 있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앞으로 다른 대기업 총수들이 편법적인 주식 발행을 통해 경영권을 2세에게 물려주는 것은 한층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
○ 경영권 상속에는 영향 없어
삼성에버랜드가 주목 받는 이유는 삼성그룹의 순환출자 구조 때문이다.
삼성그룹은 삼성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삼성에버랜드로 이어지는 지배구조를 갖고 있어 삼성에버랜드의 1대 주주는 사실상 그룹 전체를 지배할 수 있다.
▶그래픽 참조
이건희(李健熙) 삼성 회장의 아들 이재용(李在鎔) 상무는 삼성에버랜드 CB 인수 이후 이 회사의 최대주주(25.1%)가 됐다.
법원이 CB 발행 자체를 취소하라고 판결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삼성그룹의 경영권 상속 구도가 단기적으로 흔들릴 가능성은 별로 없다.
이번 판결은 제일제당을 제외한 나머지 대주주들이 CB를 싼값에 살 수 있는 권리를 잃었고 삼성에버랜드 역시 대주주의 부당이득만큼 손해를 보았다는 점만을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법원이 “이사회가 정족수를 채우지 못한 상태에서 이뤄져 CB 발행 결의는 무효”라고 판단한 대목은 두고두고 삼성그룹에 무거운 짐이 될 전망이다.
현실적으로 CB 발행 자체가 무효화될 가능성은 적지만 앞으로 검찰 추가 수사와 항소심 및 상고심 과정에서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 삼성, 앞길이 험난하다
현재 청와대와 정치권 시민단체 등은 지배구조 개선을 강력하게 주문하며 삼성그룹을 전방위로 압박하고 있다. ‘삼성 때리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
이 회장은 해외에 체류 중이지만 윤종용(尹鍾龍) 삼성전자 부회장을 비롯한 주요 계열사 대표들은 국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한바탕 곤욕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다.
따라서 이번 판결이 삼성을 압박하는 또 다른 명분으로 작용할 수 있다.
삼성그룹의 경영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대표적 사안은 금융산업구조개선에 관한 법률(금산법).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삼성의 태도에 좀 문제가 있었다”고 발언한 이후 열린우리당을 중심으로 삼성카드가 갖고 있는 삼성에버랜드 지분 25.6%를 매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더욱 커지는 상황이다.
삼성에버랜드가 삼성생명 보유 지분(13.3%)에 대한 회계처리 방식을 바꾼 것도 도마 위에 올라 있다.
일부 시민단체는 “삼성에버랜드가 금융지주회사 적용을 피하기 위해 편법을 동원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삼성은 “적법한 과정을 거쳤다”며 맞서고 있다.
금융감독원은 내년 3월 삼성에버랜드의 감사보고서를 제출받아 이를 검토할 예정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회사 설립 이후 전례가 드문 위기를 맞고 있는 삼성그룹이 앞으로 ‘반(反)삼성 분위기’를 어떻게 헤쳐 나갈지 주목된다.
김두영 기자 nirvana1@donga.com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삼성 “항소 검토”…참여연대 “이재용씨 배상해야”▼
삼성그룹은 법원의 유죄 판결 소식을 듣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만큼 당연히 무죄 판결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뜻밖의 판결이 났다”고 말했다.
다만 삼성에버랜드의 전환사채(CB) 발행 자체가 취소되지 않아 경영권 승계 작업이 무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다소 위안을 느끼는 모습이었다.
삼성은 이번 판결이 단순히 ‘업무상 배임’을 넘어서 이건희 회장에게서 이재용 상무로 이어지는 경영권 승계 작업과 관련이 있는 만큼 신중하게 대응하겠다는 방침이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아직 항소 여부를 공식 결정하지는 않았지만 법적으로 더 따져볼 여지가 있다”고 말해 항소 의사를 내비쳤다.
앞으로 금융산업구조개선에 관한 법률(금산법) 개정 등에 대한 공세가 더욱 거세질 것으로 예상되지만 삼성은 “일단 두고 보자”며 관망하겠다는 방침이다.
반면 5년 전 삼성에버랜드 경영진을 검찰에 고발한 참여연대는 환영의 뜻을 밝혔다.
최한수(崔漢秀) 참여연대 경제개혁팀장은 “검찰은 과거 무혐의 처리된 배임건에 대해 신속히 재수사를 하고 이재용 상무는 손해를 끼친 주주들에게 도의적이라도 배상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참여연대는 “당시 삼성 에버랜드 CB를 포기해 실권하도록 한 제일모직 등 삼성 계열사의 이사에 대한 소송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주성원 기자 swon@donga.com
정세진 기자 mint4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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