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필메리디스(56) SC제일은행장은 올해 4월 15일 열린 취임식에서 여러 가지 약속을 했다. 그 가운데 확실히 지키지 못한 것이 하나 있다. “한국어를 열심히 배우겠다”고 한 약속이 그것이다.
6개월이 지난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정도다. 공식 이유는 “바빠서…”라는 것.
올해 1월 취임한 리처드 웨커(43) 외환은행장도 비슷하다. 지난해 2월부터 부행장으로 일했지만 한국어를 썩 잘하지는 못한다. 두 살배기 막내딸이 집안일을 돕는 아주머니와 한국말로 대화하는 걸 보면 주눅이 든다는 것.
비록 말은 서툴지만 두 미국인 시중은행장의 ‘토착 경영’ 노력은 각별하다.
웨커 행장은 4, 7, 8월 세 차례 서울역과 청량리역 등에서 노숙자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사랑의 밥퍼’ 봉사활동을 벌였다.
기업 이익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뜻에서 금융권에서는 처음으로 사회공헌 독립법인인 ‘외환은행 나눔재단’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이 재단은 보건복지부 승인을 앞두고 있다.
웨커 행장은 다양한 음식을 즐기지만 특히 한식을 좋아한다. 이전에 같은 직장(GE)에서 일했던 부인의 불고기 요리 솜씨가 수준급이라고 자랑한다. 하지만 홍탁(삭힌 홍어와 탁주)은 몇 번 시도했지만 익숙해지지 않는다고 했다. “호남영업본부를 방문했을 때 맛본 홍탁은 맛이 너무 강했다”며 고개를 저었다.
별명이 ‘일벌레(workaholic)’인 필메리디스 행장은 주말, 휴일에도 주로 출근해서 일을 챙긴다. 가끔 혼자 지하철을 타고 서울 곳곳을 ‘탐험’하기도 한다.
SC제일은행 관계자는 “나름대로 한국 생활에 적응하고 사람 사는 ‘냄새’를 맡아보기 위한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12일 ‘미래형 점포’인 서울 강남중앙지점 오픈행사에서 만난 그는 “아름답기로 유명한 한국의 가을 산을 꼭 올라 보고 싶다”고 했다.
웨커 행장은 주말엔 부인과 자칭 ‘작은 군대(little army)’로 표현하는 4명의 자녀를 미니밴에 태우고 서울 근교를 찾는 등 가족과 시간을 보낸다.
아이를 좋아해 중국과 미국에서 2명을 입양했다. 외국 출장을 다니다 새 부모를 기다리는 아이를 보고 ‘따뜻한’ 가정을 제공하기로 결심한 것. 그는 이를 두고 “지금까지 내가 한 일 가운데 가장 잘한 것”이라고 말한다.
웨커 행장은 “작년 여름 가족과 미국 여행을 했는데 아이들이 ‘한국 집에 돌아가자(Let's go back home to Korea)’고 조르더라. 아이들도 이제 한국을 고향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며 활짝 웃었다.
부인과 외동딸이 미국에 있어 한국에서 홀로 지내는 필메리디스 행장은 노동조합 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는 등 ‘상생의 노사관계’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8일엔 경희대 수원캠퍼스에서 열린 노조위원장기 축구대회에 참석해 공을 차며 흠뻑 땀을 흘렸다.
김선우 기자 sublime@donga.com
정경준 기자 news91@donga.com
황진영 기자 bud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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