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입형 ESOP, 매각 변수로 떠올라
차입형 ESOP가 도입되면 매각 대상 기업 노조의 운신의 폭이 넓어진다. 지분 인수를 위한 필요 조건인 ‘실탄’을 지금보다 쉽게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차입형 ESOP에 따라 인수대금을 조합원의 퇴직금 등으로 충당하고, 모자라면 ‘우리사주조합원의 전년도 임금 총액’ 한도 내에서 금융회사에서 빌릴 수 있다. 조합원들이 당장 가진 돈이 없어도 은행 돈으로 주식을 살 수 있게 되는 것.
예컨대 대우건설 노조는 한국자산관리공사에서 매각하는 주식의 16∼18%를 인수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주가를 1만1000원으로 계산하면 약 2500억 원의 자금이 필요하다.
대우건설 노조는 우리사주조합원 3500여 명의 퇴직금으로 1800억 원을 충당하고 부족한 돈을 금융회사에서 빌릴 계획이다.
● 노조와 채권단의 동상이몽
차입형 ESOP를 바라보는 노조와 정부 및 채권단의 시각은 극명하게 다르다.
노조는 겉으로는 우리사주조합이 일정 지분을 보유하면 적대적 인수합병(M&A)을 막는 안전장치가 마련될 뿐만 아니라 직원들의 애사심도 높아진다는 점을 내세운다. 하지만 가장 큰 목적은 역시 고용 안정이다.
또 지금까지 주요 이해 당사자 가운데 하나인 직원이 매각 과정에서 배제돼 노사 대립의 원인이 됐다고 주장한다. 직원이 지분을 갖고 있으면 이런 문제가 없어진다는 것.
대우건설 정창두(鄭昌斗) 노조위원장은 “차입형 ESOP는 노사 상생(相生)을 위한 제도”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매각해야 하는 채권단은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노조가 중심이 돼 우리사주조합의 지분을 높이는 것은 기업 매각 때 부담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은 물론 매각 가격마저 떨어뜨리는 악재라는 게 채권단의 주장이다.
하이닉스반도체 채권단 관계자는 “우리사주조합 지분이 전체의 20% 정도 되면 회사 경영에 노조의 입김이 작용하지 않을 수 없다”며 “노조의 눈치를 살피다 보면 경영 상태가 나빠져도 직원을 정리 해고할 수 없고 공장을 해외에 짓거나 이전하는 것도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증시에 상장돼 있는 기업은 일반 소액주주도 많기 때문에 차입형 ESOP가 문제로 부각돼 주가에 나쁜 영향을 미치면 다른 주주의 이익을 침해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또 직원이 시가보다 싼값에 주식을 인수하는 것에 대해 형평성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 제도는 도입했지만…
차입형 ESOP가 시행되더라도 우리사주조합이 실제로 지분을 인수하기는 그리 쉽지 않을 전망이다.
아무리 노조가 거세게 요구하더라도 칼자루를 쥔 채권단이 우리사주조합에 지분을 안 팔겠다고 하면 그만이다.
민주노동당 관계자는 “차입형 ESOP는 우리사주조합이 은행에서 지분 매입에 필요한 돈을 빌릴 수 있다는 것이지, 반드시 빌려 주라는 강제조항이 아니기 때문에 금융회사에서 ‘안 된다’고 하면 끝”이라고 말했다.
직원들이 퇴직금 등을 내놓으면서 지분 인수에 100% 동의할 것인지도 확실치 않다. 우리사주를 인수하는 것은 수천만 원을 자신이 다니는 회사의 주식에 투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시가보다 싼 가격에 산다고 해도 주가 하락에 따른 부담은 여전히 남는다.
실제로 현대건설 직원들은 1999년과 2000년에 걸쳐 우리사주를 대거 매입했다가 회사가 채권단의 관리를 받게 되고 2차례 감자(減資)를 하는 바람에 주가가 수십 분의 1로 곤두박질쳐 큰 손해를 봤다. 이 때문에 이번에 다시 우리사주조합을 통해 지분을 매입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직원도 있다.
대우조선해양 관계자는 “퇴직금 중간 정산을 한 직원이 많기 때문에 실제로 주식을 인수할 여력이 있을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매각 대상인 여러 기업의 노조가 공동 전선을 펼치는 것은 이런 점들을 의식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힘을 합쳐 공동으로 더 큰 목소리를 내서 정부와 채권단을 압박하자는 것이다. 노동계의 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정치권의 지원도 내심 기대하고 있다.
이미 민주노동당과 열린우리당 일부 의원은 노조의 입장을 지지하고 나섰다.
열린우리당 강길부(姜吉夫) 의원은 최근 국정감사에서 “대우조선해양을 일괄 매각하지 말고 우리사주조합에 우선적으로 매각하는 방향에 대해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매각 대상 기업의 노조가 공동 전선을 펴고 여기에 정치권이 가세하면 매각 작업은 시장 논리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
황진영 기자 buddy@donga.com
홍석민 기자 sm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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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국은 어떤가
기업에 약? 독?… 美서도 논란
산업은행 유지창(柳志昌) 총재는 최근 국정감사에서 “우리사주제도(ESOP)는 대기업에서 분사된 소규모 기업에나 적합한 제도로 대기업의 회사 경영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며 “기업 지배구조 및 책임경영체제가 약화돼 기업 가치가 하락할 우려도 있다”고 말했다.
최근 일부 기업 노조가 우리사주조합을 통해 지분을 인수하려는 데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 것.
이에 대해 대우조선해양 노동조합은 즉시 보도 자료를 내고 “(유 총재의 발언이) 허위 사실에 기초했다”며 강력히 반발했다. ESOP가 기업에 도움이 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직원이 자신의 회사 지분을 보유하는 ESOP는 과연 기업 경영에 득(得)일까, 실(失)일까.
ESOP와 관련해 가장 논란이 되는 회사는 미국 유나이티드항공(UA)이다. UA는 1994년 ESOP를 도입해 무려 55%의 지분을 직원들에게 넘겼다. ESOP가 널리 보급된 미국에서도 가장 과감한 사례로 꼽힌다.
그러나 UA의 실적이 급격히 나빠져 2002년 파산 신청을 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당시 미국의 일부 언론에는 ESOP 문제를 지적하는 칼럼이 실렸다. 이에 대해 대우조선해양 노조는 당시 미 주요 항공사들이 모두 어려움을 겪었고 UA는 ESOP 도입 전부터 노사 및 노-노(勞-勞) 갈등에 시달렸다고 주장했다. ESOP가 파산의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미 럿거스대 더글러스 크루스 교수는 2002년 미국 내 ESOP 도입 기업의 경영 성과를 분석한 결과를 논문을 통해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ESOP는 기업의 생산성 향상에 도움이 될 수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SOP 도입 기업의 생산성은 도입 첫해 4∼5% 추가로 향상됐다. 미국 전체 기업 평균보다 2배 높은 수치다. 직원들의 근로 욕구도 자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런 장점이 기업 규모나 상황에 관계없이 모든 기업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권위 있는 경영학술지 하버드비즈니스리뷰 6월호는 ESOP가 긍정적인 효과를 낼 수 있는 조건으로 △갓 설립돼 빠른 성장을 추구할 때 △회사 문화가 종업원 위주일 때 △치열한 시장경쟁으로 위기를 겪을 때 △획기적인 변화가 필요할 때 등을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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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민 기자 smhong@donga.com
김선우 기자 subli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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