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00여 평의 공장에서 연두부와 순두부를 생산하는 80여 명의 근로자는 지금까지 일한 햇수에 따라 5가지 직급으로 나눠 급여를 받아 왔다.
그러나 내년부터 이들은 각자 맡은 직무에 따라 기술 전문가인 ‘마스터’부터 잡무를 처리하는 ‘서포터’까지 4단계로 나뉘어 다른 직무수당을 받게 된다.
이 공장에서 일하는 한 근로자는 “직무와 성과에 따라 봉급이 달라지는 게 부담스럽긴 하지만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 더 받는 건 당연한 것 아니냐”면서 “같은 자리에서만 일하는 것이 아니고 나은 자리로 옮길 기회가 있어 더 열심히 일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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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무원은 올해 7월부터 한국노동연구원의 컨설팅을 받아 이 두부공장에 생산직 근로자의 직무급제를 도입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 공장에서 성과가 좋으면 전국 8개 공장으로 확대할 방침이다.
풀무원의 ‘실험’은 근속 연수에 따라 봉급이 늘어나는 한국의 생산직 임금체계를 뒤흔들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사무직에 이어 생산직에도 직무급제가 확산되면 한국 기업의 임금체계에 큰 ‘지각변동’이 올 것이라고 전망한다.
○ 사람 중심에서 업무 중심으로
“연공서열 체계에서는 임직원 수에 맞춰 전체 업무를 나눠 줬다면 직무급제는 필요한 일자리 수를 먼저 정한 뒤 여기에 맞춰 사람을 배치하고 급여 수준을 결정합니다.”
2002년 7월 직무급제를 도입한 삼양사 양재만(梁栽滿) HR팀 부장의 설명이다.
직무급제를 도입하면서 삼양사는 ‘사람 중심’의 직무체계를 ‘일 중심’으로 바꾸기 위해 사업목표 달성에 필요한 업무를 열거하고 이에 맞는 업무역량을 산출하는 방식으로 직무를 ‘설계’했다. 이 과정에서 기존 인력에 대한 배려는 철저히 배제됐다.
삼양사의 ‘신사업 기획담당’의 직무평가 점수는 94.71로 전체 4단계 중 가장 높은 ‘P1’ 그룹에 속한다. 반면 ‘품질분석 담당’의 점수는 61.79로 세 번째 그룹인 ‘P3’로 분류된다. 일자리 하나하나에 점수가 매겨져 있는 것이다.
2002년에 직무급제를 도입한 외환은행에서는 거래규모와 영업이익, 업무부담 등을 고려해 지점들을 A, B, C 3개 등급으로 나눠 근무자의 수당에 차이를 둔다. 같은 행원이라도 A지점에 배치되느냐 B지점에 배치되느냐에 따라 직무수당이 월 10만 원 차이가 난다.
외환은행 관계자는 “C지점에 배치되면 A지점보다 매달 20만 원의 수당이 줄어 불만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성과급을 통해 이를 보충하려 노력하는 직원이 많다”면서 “월급은 회사가 주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삼양사 태평양 등의 직무급제 도입 컨설팅을 맡았던 미국계 인사컨설팅업체 ‘타워스 페린’은 최근 대기업과 중견기업, 공기업 등 10여 개 업체에서 상담 요청을 받고 있다.
박인호(朴仁浩) 타워스 페린 상무는 “직무 가치를 반영해 급여 수준을 정하는 것은 시대 흐름이고 기업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라며 “한국 기업들도 직무 중심의 임금 시스템이 언젠가는 통과해야 할 단계라는 사실을 인식한 것 같다”고 말했다.
○ 직무분석 비용-노조반발이 걸림돌
1997년 외환위기 이후 ‘1차 임금혁명’ 기간에 한국 기업들은 앞 다퉈 ‘성과급제’를 도입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업이 임직원들의 반발을 우려해 기존 호봉제 체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호봉제+성과급제’의 어중간한 임금 시스템을 유지해 왔다. 최근 나타나고 있는 임금제도의 변화는 ‘직무급+성과급제’인 서구 형태에 한 발짝 더 다가선 것이다.
하지만 직무급제가 기업의 인사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해 주는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삼성경제연구소 인사조직실 태원유(太源有) 수석연구원은 “일자리 중심으로 사람을 채용하고 임금을 정하면 회사의 필요에 따라 수시로 사람들을 자유롭게 배치하는 일이 어려워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직무급제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연공서열식 임금체계에 익숙한 노조와 임직원들의 반발을 이겨내는 것도 만만찮은 일이다. 많은 대기업이 직무급제 시행을 검토하고도 실제 도입을 주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삼성그룹의 한 관계자는 “대부분의 계열사는 이미 직무급제 도입을 위한 ‘직무 분석’을 끝낸 상태지만 조직에 올 충격이 커 시행을 미루고 있다”고 말했다.
고용주와 피고용인이 일자리의 가치를 놓고 ‘계약’을 하는 전통을 가진 서구와 달리 한국에서는 일자리의 ‘시장 가치’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것도 문제다. 이 때문에 직무급제를 도입하려는 기업들은 ‘직무 분석’에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노동연구원은 내년에 ‘임금 정보화 사업’을 본격 추진해 기업의 인사 담당자들에게 다양한 직무에 따른 임금 정보를 제공할 계획이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
김창원 기자 changkim@donga.com
■ 직무급제 도입해봤더니
국내에서 직무급제를 시행하는 대표적 기업으로는 CJ㈜, 태평양, 오리온, 삼양사 등이 꼽힌다.
모두 미국계 인사컨설팅업체 타워스 페린의 컨설팅을 받아 각 직무를 분석해 개별 직무의 책임과 역할을 분류했다.
이들 회사는 새 제도에 대한 안내 책자를 만들어 직원들에게 배포하고, 사내 인트라넷에 관련 게시물을 올리는 등 꾸준한 홍보활동을 벌여 왔다.
그러나 제도 시행 초기에는 노동조합의 반발에 부닥치는 등 시련도 있었다.
김상균(金相均) 태평양 인사팀 부장은 “다수가 노조 조합원인 생산직에는 직무급제를 도입하지 못하고 기존 호봉제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오리온, 삼양사 등도 직무 점수를 차별화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생산·기능직에는 역량급제를 적용하는 절충형을 택했다.
국내 기업 중 처음으로 2000년 3월 직무급제를 도입한 CJ그룹에서는 CJ㈜를 비롯해 CG GLS, CJ엔터테인먼트, CJ푸드시스템, CJ홈쇼핑 등 5개 계열사가 이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CJ㈜의 경우 여느 기업의 과장, 부장에 해당하는 G5, G6, G7등급 직원 중에 평가가 낮은 직무를 배정받으면 “비전이 없다”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회사를 떠나기도 했다.
자신이 맡고 있는 직무 등급이 저평가됐다고 항변하거나 연속으로 나쁜 평가를 받았을 때 제도에 대한 불만을 나타내는 직원들도 생겨났다.
직무 중심으로 조직이 구성되다 보니 직함과 업무의 ‘괴리’가 발생했다. CJ㈜는 직무급제 시행에 맞춰 직함 호칭을 아예 없앴다.
이종기(李宗圻) CJ㈜ 인사팀 부장은 “초기 1, 2년 동안에는 직원들이 적응하지 못하고 ‘김 부장님’식으로 상사의 직함을 불렀다”며 “그러나 이제는 실무자부터 임원까지 예외 없이 이름 뒤에 ‘님’자를 붙여 부르기 때문에 임직원 간의 친밀감이 강화됐다”고 말했다.
직무급제를 시행하는 회사의 직원들은 제도 시행 이후 조직 내 성과주의가 지나치게 강조돼 과거의 인간적 가족주의 문화가 사라졌다고 개탄하기도 한다.
그러나 직원 개개인의 역할과 책임이 분명해져 일의 효율성이 높아졌다는 데 대해서는 거의 이견이 없다는 평이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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