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술(鄭文述·전 미래산업 회장) 미래산업 상담역의 고백이다. 정 상담역의 말대로 한국 수출기업들에 해외 법률분쟁은 기업의 생존을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다.
▽“죽느냐 싸우느냐의 문제”=경북 구미시의 R전자는 미국 시장에 연간 3000만 달러어치의 전자제품을 수출하는 중소기업이다. 이 회사는 현재 미국에서 다국적기업과 3건의 소송을 진행 중이다. 모두 제소를 당한 입장이다.
원고인 다국적기업은 R전자가 리모컨 제조 기술에 관한 특허를 침해했다며 합의조건으로 리모컨 1개에 1달러의 로열티를 요구하고 있다. 리모컨의 수출가격은 개당 3∼5달러. 리모컨 1개를 팔아서 나는 이익은 1달러에 훨씬 못 미친다. R전자로서는 들어줄 수 없는 조건. R전자로서는 ‘목숨 걸고’ 싸우는 수밖에 없다.
이 회사 관계자는 “우리 회사뿐만 아니라 한국 전자제품 수출기업의 상당수가 미국과 유럽의 거대기업으로부터 소송을 당하고 있다”며 “해외에서 소송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은행 대출 등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모두 쉬쉬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미국 뉴욕 등에서 소송을 당한 모 전자회사는 소송 현황에 대해 취재하자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대답만 되풀이했다.
한국 기업들이 해외 소송 상황에 대한 공개를 꺼리고 있다는 사실은 30대 대기업(유가증권시장 시가총액 기준)이 금융감독원에 제출한 사업보고서를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2005년 11월 말 현재 LG전자는 모두 169건의 해외 소송이 진행 중이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LG전자보다 규모가 훨씬 큰 삼성전자는 15건이다. 하이닉스반도체도 8건만 보고했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소송 현황은 의무보고 사항이 아니어서 대부분의 기업이 외부에 알려진 소송 중심으로 일부만 보고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법정은 세계의 법정=대부분의 주요 소송은 미국 법원에 제기된다. 일본의 반도체에너지연구소(SEL)는 1997년 삼성전자를 상대로 미국 버지니아 주에 있는 연방법원에 3건의 소송을 제기했다. 일본 기업이 한국기업을 상대로 미국 법원에 소송을 낸 것이다. 미국 내에 지사를 두고 있는 SEL은 삼성전자도 미국에 현지법인을 두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미국 법원에 소송을 냈다.
한국전력도 1997년 필리핀에서 한 계약이 문제가 돼 미국 법원에 제소됐다. 미국 연방법원은 이들 사건에 대해 모두 관할권을 인정하고 재판을 진행했다.
지난해 3월 미국 뉴욕 남부 연방법원은 미국 소액투자자들이 중국 최대의 생명보험회사인 차이나라이프를 상대로 낸 증권집단 소송에서 관할권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차이나 라이프는 2004년 12월 미국 증시에서 주식예탁증서(ADR)를 발행했는데, 발행 후 주식가격이 떨어지자 투자자들이 기업 관련 정보를 제대로 공시하지 않았다며 소송을 낸 것. 이 판결대로라면 미국 뉴욕증권거래소에서 ADR 등이 거래되고 있는 30여 개의 국내 기업도 모두 증권집단 소송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미국 법정이 세계의 법정이 되고 있는 현상은 법률전쟁의 무대가 한곳으로 통합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에 따라 세계 기업 간의 법률전쟁은 더욱 치열하게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천문학적인 변호사 비용=R전자의 경우 2003년 처음 소장을 받고 국내 변호사를 통해 미국 뉴욕의 C로펌을 소개받았다. R전자의 법무 담당자는 C로펌의 변호사들과 몇 차례의 e메일과 전화 상담을 거쳐 법원에 낼 답변서를 부탁했다. R전자는 C로펌에 착수금조로 2만5000달러를 지불했다. C로펌은 ‘R전자가 제소된 사건에 관해 뉴욕 법원은 관할권이 없으므로 소송은 각하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답변서를 제출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C로펌은 R전자에 추가 변호사 비용으로 11만6900여 달러를 청구했다. R전자가 거부하자 C로펌은 곧바로 뉴욕 법원에 변호사 비용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최근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반도체가 미국 시장에서의 D램 반도체 가격담합을 이유로 각각 3억 달러와 1억8500만 달러의 벌금을 내기로 미국 법무부와 합의한 배경에도 변호사 비용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소송으로 갈 경우 벌금 이외에 천문학적인 규모의 변호사 비용을 로펌에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다소 불만족스러운 조건임에도 미국 법무부와 합의했다는 것.
삼성그룹 관계자는 최근 한 사건에서 변호사 비용으로 미국 로펌에 100억 원 이상을 지불했다고 밝혔다.
▽대책 마련 급하다=국내 대기업 관계자들은 “해외소송이 제기되는 것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기업의 활동이 많아지고 다양해짐에 따라 해외에서 법률분쟁이 일어나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해외 법률분쟁을 되도록 줄일 수 있는 예방책을 마련하고, 불가피하게 제기된 소송에 효율적으로 대처하는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이 관계자는 “현재 예방 법무 또는 준법교육의 활성화를 통하여 해외에서 피소될 가능성을 최소화하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수형 기자 sooh@donga.com
정효진 기자 wiseweb@donga.com
▼“한국기업은 딥 포켓… 건드리면 돈나와”▼
미국의 로펌 사이에서 한국의 수출기업은 ‘딥 포켓(Deep Pocket·깊은 주머니)’이라고 불린다. ‘딥 포켓’은 돈이 많아서 배상을 할 여력이 큰 상대방을 일컫는 영어 은어. 한국 기업이 미국 소송사냥꾼들의 좋은 표적 또는 먹잇감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는 말이다.
“한국 기업들을 건드리면 돈 들고 온다”는 말이 미국 현지 로펌 사이에서 오르내리고 있는 것도 이 같은 현상을 잘 나타내 준다.
한국 기업이 이처럼 미국 법률시장에서 ‘봉’이 되는 것은 어쩌면 숙명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삼성그룹 해외법무팀 관계자는 “한국 기업으로서는 해외시장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억울하게 제소되더라도 소송으로 갈 경우 막대한 변호사 비용이 들고 그 과정에서 유·무형의 자산이 소모된다는 점 등을 고려해 상대방과 합의로 해결하는 현실적인 대안을 택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언어와 법률의 장벽도 중요한 원인이다. 미국에서의 소송은 영어와 미국법을 기준으로 진행되는데, 이에 대한 능력과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합의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합의는 ‘딥 포켓’과 같은 악순환을 초래한다. “한국 기업은 소송을 걸기만 하면 돈을 준다”는 평판을 얻게 돼 한국 기업을 상대로 한 소송이 남발되기 때문. 미국에서는 소송의뢰인(원고)이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소송을 제기하고, 승소할 경우 엄청난 금액의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는 방법(성공불 보수계약·Contingency fee agreement)이 널리 활용되기 때문에 일반인에 의한 소송도 많이 제기된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커크패트릭’ 로펌의 제임스 리 변호사는 “한국 기업도 월트디즈니의 소송 대응 전략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디즈니의 경우 소송이 제기되면 절대로 합의하지 않고 끝까지 가는 전략을 택했고, 이것이 변호사와 소비자들 사이에 잘 알려져 변호사들조차 디즈니를 상대로 한 소송은 기피한다는 것이다.
이수형 기자 so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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